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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 다음 생에 할 일들
  • 안주철
  • 8,550원 (5%450)
  • 2015-06-15
  • : 388
-20210217 안주철.

오늘 밖은 영하 십 도라는데, 체감 기온은 십팔 도라는데, 직장 대가리는 뭐에 꽂혔는지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직원들 사십명 남짓을 몰아 넣고 아주 훌륭한 강의하신다는 강사를 모시고 집합 교육을 시켰다. 거리두기 한답시고 그 넓은 공간에 1미터 간격으로 접이식 의자를 펼쳐 두고 거기 앉아서 히터 몇 개로는 택도 없는 밖이나 다름 없는 안에서 덜덜 떨면서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정작 대가리는 자기는 들은 교육이라고, 중간에 몇 분 잘들 듣고 있나 감시하러 와서 휘휘 돌아보고는 자기 집무실로 금세 가버렸다. 체감 기온 십팔...도.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옆 동료 말대로 욕구 위계(매슬로우ㅋㅋㅋ)에서 밀려버리면 무용하다. 나는 롱패딩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뺐다 해도 소용이 없어서, 강의 자료 나눠준 묶음에 품 안에 숨겨온 시집을 겹쳐 두 시간 동안 읽었다. 몸이 추우니 마음이라도 곁불을 쬐야했단 말이다. 이렇게 휘떡휘떡 시를 읽는 건 아닌 일인데 얼어뒤지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했다. 춥다 못해 머리가 아파오고 결국 저녁까지 머리가 아파서 타이레놀 한 알을 좀 전에 먹고 남은 시집을 다 읽었다.

-거지는 모닥불 앞에서 한장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그의 몸은 다 녹아내려 질척거리고
모닥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살점부터 깨진 유리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 중)

나라는 거지에게 오늘의 모닥불이 되어준 안주철 시인의 첫 시집에는 살점, 혀, 이웃, 마을, 개, 피, 이런 게 많이 나왔다. 그래서 좋았다. 친구가 시인님과 친하다고, 원주 가서 시인님 사는 컨테이너 박스 가서 밤새 술마시고 고양이랑 놀다 자고 온 걸 자랑하길래 한참 전에 시집을 사 놓고는 이제야 읽었다. 시집 읽기 전에 미리 검색해 읽었던 시들 보면, 참, 좋은 남편은 아니다 시인이란...글쓰는 남자란 좋은 애인도 배우자도 되기 어렵겠다...싶었지만 뭐 그러고 싶어 그러겠니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겠어, 글쓰는 여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네, 하고 생각했다.

+밑줄 긋기
-1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며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나는 집에서
한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말을 한발자국씩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나는 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이가 진심으로 기다리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을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백수가 될 때마다 나는
아내의 등골을 매일 한숟갈씩 떠먹으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책을 읽어주는 나를 좋아하게 만든다.

2
꿈을 하나 지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쉽게 지워지는 꿈이 신기해서
아내의 꿈도 슬쩍 하나 지운다. 아내의 꿈도
잘 지워진다. 아내는 자잘한 꿈이 많아
손이 많이 간다.

꿈을 지울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하나씩
늘어난다. 구멍을 세는 것이 재미있어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꿈을 지운다.

꿈이 지워질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뚫린다.
아내의 몸에도 구멍이 숭숭 뚫린다. 구멍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혈관이 들어 있는 꿈을 지우고 말았다.

투명한 몸을 한방울씩 적시며 피가 흘러내린다.
(‘꿈을 지우다’ 전문. 잘 지워지는 꿈이라니 눈물 또르르…1)

-설교는 한시간이어도 일분이어도 길다.
거짓말을 수집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좀더 시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면 많은 거짓말이 무늬를 이룰 것이다.
사랑한다, 오해였다, 머뭇거렸다, 너무 늦었다.
해석을 사랑하는 거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해석을 사랑함’ 중. 하...강의 억지로 들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와닿아버린ㅋㅋㅋㅋ길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를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다음 생애 할 일들’전문. 덜덜 떨고 나서 또 덜덜 떨면서 급식 먹었지...ㅋㅋㅋㅋ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눈물 또르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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