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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 [전자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 13,860원 (690)
  • 2019-05-27
  • : 224
-20210216 최순우.

수능과 대입 전형이 모두 끝나고, 합격자 발표에 기뻐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이맘쯤이었다. 막 스무살이 된, 고딩도 대딩도 아닌 공백기의 나새끼는 잠시 여행 다녀오겠다고, 아빠는 술 좀 그만 먹으라고 짧은 손편지를 남기고 첫 가출을 했다.
목적지는 영주 부석사. 국사책과 비문학 영역 지문(아마도 최순우의 글)에서만 접하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꼭 직접 보고 싶었다. 다른 목적도 있었는데, 거의 이년을 짝사랑하던 락동호회의 동갑내기 남자애 하나가 영주 바로 옆 봉화군에 살고 있었다. 사는 곳도 멀고 그간 락동호회 정기공연 때 단 한 번 본 게 다인 그 아이에게 난 푹 빠져 있었고, 나의 구애와 그 아이의 거절과 눈물바람을 이미 여러번 반복한 뒤였다. 그래도 수능 끝나면 놀러오라던 그 아이와의 약속을 지킨답시고 칙칙폭폭 느려터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봉화에 갔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그 애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여전히 내게 아무 것도 열지 않는 아이 앞에서 눈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이와 함께 영주로 건너가 부석사를 둘러보았다. 무량수전도 보고, 선돌도 보고, 옆에 공사중인 탑도 돌아보고, 안양문을 지나도 극락은 없고, 부석사 앞 된장찌개 파는 집은 맛도 없고 바가지 씌우고, 우리는 시내로 와서 피씨방에 갔다 노래방에 갔다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홀로 숙소를 잡아 잠을 자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그만큼 멀리 가본 건 처음이었고 짝사랑은 내내 짝사랑이라 슬펐지만, 그래도 부석사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절이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일년 후 쯤 남자친구가 생기고 나서 다시 부석사에 놀러갔다. ㅋㅋㅋㅋ겨우 두번 갔는데 멀리 보이는 소백산줄기랑 뒤곁 단청 그림 같은 게 어른거린다. 영주는 시내에 김밥천국이 제일 맛있습니다...왜 그 동네는 밥이 맛이 없는 걸까…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 부석사...

네이버블로그에 책 열심히 읽는 이웃분이 이 책 좋다고 추천하셔서, 제목도 마침 내가 좋아하는 사찰 가람이 붙었으니 읽고 싶어져서 빌렸다. 앞의 제법 긴 글은 잘쓰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를 이렇게 세련되게 물고 빨면 수차례 개정교육과정 거치면서 국어 교과서 저자들이랑 수능 출제위원들이 눈독을 안 들였을리가 없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2020년 수능에 딱 백자 달항아리가 지문으로 실렸다. ㅋㅋㅋ
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고, 다양한 미술품과 문화유적에 조예가 깊고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현할 만한 아름다운 문재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처음에 저자 연보 보는데 딱 돌아가신 날이 내가 태어난 그 해 그 날이라 오, 난 이 책을 읽을 운명이었어!하고 괜히 좋아했다. 옛 사람이라 예쁜 그릇이나 그림에 잘 생긴 며느리 같은 비유 붙이는 건 조금 낡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림과 건축물과 공예품을 묘사하는 글솜씨가 대체로 좋았다. 음 멋을 아는 사람이군, 싶은 글이 잔뜩이었다. 글과 함께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니 어디가 예쁘고 멋지고 근사한지 조금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외가가 광주 분원 백자 빗던 도요지 근처였어서 도자기 사진과 글을 보고 조금 반갑긴 했는데, 뒷부분에 청자-분청사기-백자를 잔뜩 나열한 건 읽기에 조금 지루했다.
사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구석구석의 박물관 다니고 유물이랑 미술품도 많이 봤구나 싶었다. 책 보면서 어 저거 나 실물 봤는데 헤헤 하고 기억나는 게 많아서 좋았다. 책을 봤으니 박물관에 다시 가면 더 반갑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로나야 언제 나들이 시켜줄 거니.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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