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아직 멀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12/01 20:27
  • 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 12,150원 (10%670)
  • 2020-02-14
  • : 25,971
-20201201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안녕 주정뱅이’에 이어 읽은 권여선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레몬’을 사 놓고 아직 보지 않았다.
직전에 읽은 ‘안녕 주정뱅이’에는 혼자 살며 술에 쩐 평행우주의 나들 같은 언니들이 잔뜩 나왔다. 이번 소설집은 그보다 다양한 화자, 인물, 상황이 나왔는데, 단편소설은 말이다, 이렇게 쓰는 거란다, 참 쉽지? 하고 소주잔을 쭉 빨아들이는 작가님 얼굴이 괜스레 어른거렸다.
읽은 지도 쓴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마음을 쏟고 잘하고 싶다, 계속하고 싶다, 하는 일이 생긴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성질이 급해 잡은 손을 성급하게 놓곤 했다. 진득하니 잘 익고 발효된 무언가를 쥐고 계속 할 수 있길, 향기롭고 감칠맛 나는 글들을 먹으면서 바라본다.

-모르는 영역
언젠가 늙은 날 “왜 해도 됩니까,한 번은?”하고 소리지르며 내 곁에서 달아날 아이들을 상상하면 숨이 막힌다. 딸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고기를 사주고 돌아오는 중년 아저씨 이야기인데 왜 내가 사주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인가 모르겠다.
-손톱
엄마가 자매에게 빚을 남기고 도망가고, 언니도 똑같이 소희에게 빚을 남기고 도망가고, 그런데도 직장을 얻어 스스로 벌고 빚갚을 궁리할 만큼 자란 건 기적 같고 대단한 일 같은데, 도무지 희망이란 없고 손톱만 다쳐도 어그러지는 삶이란, 너무 슬프고 가혹했다.
-희박한 마음
누군가 거칠어지는 나를 견디지 못해 떠나고 홀로 남아 이전 일을 가물가물 떠올리는 남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기이한 소리를 내는 수도 파이프 소리를 무심하게 견딜 수 있을까. 엉엉.
-너머
기간제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 이야기가 생생했다. 언젠가 껍질만 남아 바스라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생각만해도 무섭고 슬픈데. 이미 그러고 있는 당신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나요.
-친구
이제 학교에서 폭대위를 하지 않고 교육청으로 넘긴다. 친구아이가, 하는 말은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견디는 아이들에게 무감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송추의 가을
파묘랑 많이 비슷한 느낌인데 잔잔하지 않고 내내 갈등과 빡침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혼자 있고 싶다잖아 씨발! 하는 막내둥이 왜 이리 슬프냐.
-재
변신의 그레고르와 토성의 고리 속 제발트가 맞은 편 길에 마주하고 있다면. 그레고르가 창너머로 병원을 봤을 줄은 나도 몰랐다. 창너머로 많은 걸 보는 사람들이 뭔가를 쓴다. 아 나도 보긴 봐야지 토성의 고리 샀으니 봐야지 ㅋㅋㅋㅋ변신은 몇 번 봤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또 봐야겠지...또르르...
-전갱이의 맛
성대 용종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화자가 자꾸 성기 낭종 수술을 떠올리듯 난 대장 용종 수술이 떠오르곤 했다. 후두염와 성대결절과 성대폴립 때문에 묵언 기간을 자주 가져봤는데, 소설에서만큼 말을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아예 말하지 말라고는 안 하고 천천히 말을 하라고 했다.
성대 용종 수술 후 병가 동안 혼자 지리산에 숙소를 잡고 며칠 요양했다. 폭포에도 가고 밤도 줍고 산수유공원에도 가고 읍내 빵집에도 가고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아파야지나 혼자 될 수 있는 삶은 행복하기도 번잡하기도. 말하지 않는 직업 나도 가지고 싶다….


+밑줄 긋기
-그는 휴대전화 소리를 죽이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게 거추장스러웠다. 매트리스를 누르는 자신의 몸무게도, 감은 채 파르르 떨리는 양 눈꺼풀도, 뇌의 틀을 맴도는 말벌 같은 생각들도. 요즘 그는 종종 힘이 들었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생은 그를 여기까지 데려와놓고 그가 이제 어떻게든 살아보려니까 힘을 설설 빼며, 이제 그만, 그만 살 준비를 해, 그러는 것 같았다. 희망이 없어, 그는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차라리 단칼에 끊어내고 싶다, 증발하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지금, 이순간, 이대로……(’모르는 영역’ 중)

-휴대전화 매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소희는 너무 춥다. 배도 고프다. 그래서 뛴다. 계획대로 스물일곱, 스물여덟에 대출금을 갚고, 보증금 천만원 정도, 깔고 앉는다면, 그래서 그때부터, 매년 천만원씩, 모을 수 있다면, 서른여섯, 서른일곱쯤에, 일억을, 모은다면, 그렇게 내년부터, 십오년 넘게, 죽을힘을 다해 달려, 헉헉, 일억을 움켜쥐고, 백이십사 다시, 십오번지, 백일호에 도착하면, 저 대추 같은 할머니가, 만약 살아 있다면, 또 고개를 저으면서, 손가락을 치켜세워 흔들면서, 안 돼, 안 돼, 하겠지, 그땐 얼마를, 일억오천, 헉, 이억, 그땐 도대체 얼마를, 헉, 얼마를, 부를까…..
소희는 가로수 아래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쉰다. 소희는 정말 진수씨 싫은데, 뭐든 자기는 다 아니까 이해하니까 그러는 진수씨 싫은데, 가끔 그가 떠들어댄 말 중에 어떤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말…...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면 또 마음이 상하잖아요…...소희도 사람이기 때문에…...스물일곱, 스물여덟까지…...서른다섯, 서른여섯까지…...그러면…...또…….마음이……(‘손톱’ 중)

-가끔 예고 없이 출현하는 그것은 데런의 고질병이었다. 데런은 늘 그것을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그 의지가 생겨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튀어나온 후였다. 언젠가 디엔은 데런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기 직전의 표정에 대해 얼음이 타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데런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약간은 허탈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바라본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매우 평온해 보이는데, 그때 아마도 데런 너는 곧 진행될 폭발에 대해 섬광처럼 짧게 숙고하는 것 같다고, 폭발 이후의 미래를 일별하고 그 혹독한 대가를 예감하면서도 그 무서운 미래가 실현되고 말리라는 것을 아는 얼굴이라고,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려는 분신자가 마치 먼 행성의 폭발을 기다리는 천문학자처럼 냉철한 눈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내부의 심연이 균열되는 걸 최후로 관조하는 눈이라고 디엔은 말했다.
그런데 얼음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찰나엔 말이지, 하고 디엔은 말했다. 그때의 데런은 더이상 자신이 알던 데런이 아니고 절대적인 무엇을 담지한 순수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저 산불처럼 무섭게 번지는 파괴 앞에서 타 죽어도 마땅한 작은 벌레나 마른 풀포기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고 했다. 그것은 확실히 디엔에게 어마어마한 공포였으리라고 데런은 말했다. 디엔은 정말 그렇다고, 그런 일은 아무리 겪어도 너무나 두렵다고 하면서, 데런 네가 그렇게 드라이아이스처럼 하얗게 타버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 같아서, 라고 말했다. 그런 폭발이 일어났던 날들에 대한 기억, 웃던 디엔을 순식간에 겁에 질리게 했던 지워질 수 없는 날들의 기억 때문에 데런은 때로 눈알이 드라이아이스처럼 타는 것 같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희박한 마음’ 중)

-늦은 밤에 그는 우산을 챙겨 집을 나왔다. 빗줄기가 가늘어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가로 향하는 길에 젊은 청년과 마주쳤다. 청년은 접은 우산의 손잡이를 손목에 걸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비가 그쳤나 싶어 우산을 접었다가 그는 열 발짝쯤 지나 다시 우산을 폈다. 그새 얼굴과 머리카락이 눅눅해졌다. 창백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빗방울이 은가루처럼 미세하고 촘촘해 어두운 허공에서 우윳빛 액체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재’ 중)

-그가 휴대전화를 켜 시간을 확인하는데 옆자리에서 중년 남자의 사투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애가 말이야 해충이 돼버린 기야. 이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것이 카프카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레고르 잠자가 해충이 되었다는 번역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띄엄띄엄 들려오는 남자의 말은 그에게 놀라움과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걔는 드러운 음식만 먹게 된 거라. 걔가 나중에 어떻게 죽냐 하면, 애비가 사과를 던진 기야, 걔한테. 집에서 막 돌아댕기지 말라고. 그게 상처가 돼서 죽은 기야. 그는 ‘변신’에 대한 사뭇 폭력적일 만큼 간명한 요약에 신선한 경이를 느끼며 그들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상대편 남자가 물었다. 그기 다 결국은 상상 아이가? 그러자 이야기를 꺼낸 남자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상상이지 다……(‘재’ 중)

-아무래 생각해도 그는 이 장면이 그레고르에 대한 냉혹한 예언처럼 생각되었다. 긴 병원 건물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연약한 둥근 머리를 관통하는 잿빛 쇠막대처럼 여겨졌고, 더 나아가 어쩌면 모든 병원이 작은 창문 속 병실에 갇혀 있는 환자들을 불가능한 삶의 희망을 볼모로 꼬치처럼 꿰고 있는 쇠꼬챙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들은 쓸모없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가족의 재산을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들이며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바삭한 껍질만을 남기고 죽어야 하는 그레고르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재’ 중)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 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나는 잠깐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말이란 게, 하고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걸 자신에게 알려주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고 했다.
“내가 알 수 있게! 내가 알 수 있게!” (‘전갱이의 맛’ 중)

-어떤 말들은 뜻을 알 수 없는 채로 생겨난다고 그가 말했는데 정확히 그렇다. 어떤 감정이나 감각들은 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몸으로 표현되고 기억에 각인된다. 예를 들어 나는 아직도 내 첫 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처음엔 ‘안녕’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 뜻을 알고 싶어 가끔 주먹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주머니를 아래쪽으로 꾹꾹 누르면서 또박또박 걸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가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계속 진행시킬 때, 무엇인가가 드러나기보다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걷는 행위 속으로 사라지는 무엇이 보인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작게, 점점 작게, 주먹 쥔 손의 작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점멸하며 살아 있다. 모든 건 사라지지만 점멸하는 동안은 살아 있다. 지금은 그 모호한 뜻만으로 충분하다. (‘전갱이의 맛’ 중)

-오래전, 언제인지 나만 아는 그 시절, 작가의 말이 쓰고 싶어 미칠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소설보다 작가의 말이 더 쓰고 싶었던 때가, 눈시울을 붉히며 독자에게, 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눈물겹게 말을 건네고 싶었던 때가. 이제는 안 그런가.

모르겠다.

요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
그래도 독자여 나의 눈물겨운 독자여 내가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그날이 오면 부디 우리 다시 만날까 작가의 말도 모르겠다는 말도 아직 멀었다는 말도 하지 말고 나는 식어 차고 당신의 손은 따뜻할 그날에(’작가의 말’ 중)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