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은 사회적 또는 공공적인 형태로만 구축될 수 있으며 기능할 수
있다.
사회적 또는 공공적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학설 곳곳에 퍼져 있는 ‘채워져야 할 빈 곳’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하나하나 채워지는 역동적인 형식으로 구성되는
것이어야만 사회적 또는 공공적인 언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리적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도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은 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도 그 자리에 참가하도록 정식 초대장을 보내야 한다.
사회성,
공공성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찬동자의 많고 적음에
의해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도 구성원으로 포함하여 시공을 넘어선 공동체를 꾸려 나가는
양상이다.
카를 포퍼는 일찍이 과학자는 선행 세대 과학자들의 “어깨 위에 서서”
일하고 있다는 탁월한 비유를 구사한 바
있다.
앞 세대가 ‘넘겨준 것’을 받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한다.
포퍼의 사회적 또는 공공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이어짐이다.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놓아두기 위한 상상력의 가동을
기피하고,
동일한 것은 반복하여 시간의 흐름 자체를 멈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본질이다.
‘불경기’나 ‘거품 현상’같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것’은 인정받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쇼와의 격변기에 들어섰을 때 가족 국가론에 입각한 국가 관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이 관념이 자장 안에서 국가의 구조는 이에 제도의
직접적이고 동심원적인 확대판이다.
물론 그 정점에는 국가=위대한 이에의 우두머리인 천황이 등극한다.
전향자에 대한 온정주의도 이 구조에서
발생한다.
공산주의자는 일시적으로 가족의 화합을 저버린
문제아인 것이며,
전향은 다시 ‘가족’
품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안유지법은 실로 이 관념을 금한 것이다.
이 관념을 버린다는 것은 사회 내재적인
적대성,
즉 ‘부정적인 것’의 존재를 부인하고 ‘사랑의 공동체’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사회 내재적인 적대성을 부인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정당한 권리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없고 그 결과 침해받은 권리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부당한 특권을 주장하는 무리로
여겨진다.
그럴 때 모든 권리는 이권에
불과하다.
‘아래’로 향하는 시선이야말로 수전 손택이나 어슐러 르 귄이 지닌
특징이다.
그것은 어쩐지 ‘위’로만 향해 있는 다수파의 사고방식과 정반대로 향해
있다.
그녀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세상의 다수파와 반대의
벡터라는 점을 충분히 자각했다.
자기 행위의 검증과 반성은 그 자체가 두드러지게 지성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성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 행위를
상대화하는 관점을 가질 수 없을뿐 아니라 검증할 수도 없거니와 반성도 없다.
일본과 추축 관계였던 독일은 전쟁 책임자를 확실하게 ‘나치’라고 지명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치를 지지한 것은 당시 가장
민주적이라고 일컬었던 바이마르 헌법 하의 독일 국민이었다.
따라서 나치만 전쟁 범죄자라고 하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독일은 모든 전쟁 책임을 나치에게 뒤집어씌우는
허구를 지어냄으로써 독일 국민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역대 지도자들은 독일인이 그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몇 번이나 그 시대의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연설을 반복했다.
국내에 박물관을 만들고,
수용소를 역사의 증거로 남기고,
중학교 때부터는 바이마르 헌법 하에서 나치가
대두하는 정치적 과정을 가르쳤다.
그리고 사위스러운 자기들의 과거를 극복할 것을
국민적 과제로 삼았다.
일본은 오히려 군국주의자들도 나라를 위해 싸운 영령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셨다.
그 결과 일본인은 누구도 독일인처럼 허구에 대한
속죄 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없었다.
전후의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어리석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책임을 자기 것으로 생각할 기회는
잃어버렸다.
독일과 일본은 다른 방식으로 전후 국민의 죄를 면해
주었다.
한쪽은 허구를 지어냈고,
다른 한쪽은 전사한 모든 자는 영웅이며 피해자라는
신앙을 만들었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잡하고 질박한 옷을 걸치고 참회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감정을 가진 인간에게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 세대 사람들은 우리에게 난제의 유산을
남겼던 것입니다.
죄의 유무,
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전부가 과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과거로 인한 결과와 관련되어
있고,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마음에 새기는 일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 노소가 서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과거를 바꾸거나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눈감은 자는 결국 현재에도
깜깜해집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고 하지 않는 자는
또다시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