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lulujw7 2025/10/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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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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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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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당신의죽음을허락합니다_에리카프라이지히 #박민경옮김 #최다혜감수 #스마트비지니스 #이토록멋진작별의방식 #간절한죽음이라니
죽음을 허락한다는 제목을 보자 몇 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래는 부모님도 함께 싸인을 하셨으면 했지만,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나 혼자 조용히 싸인했다. 그때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저 편하게 받아들였었는데 언제부턴가 낯설고 멀게 느껴졌고 왠지 피할 수 없는 숙제처럼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한동안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래, 죽음이란 게 나에게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막상 나이가 40 중반을 향해 가면서 그 다짐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P.86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병마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는 오롯이 환자 스스로만이 판단할 수 있으며 판단해야 한다. 다만, 나는 어떠한 대안이라도 있다면 환자에게 그 대안을 제시해 돕고 싶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이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죽음’이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나 자신도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저 멀끔히, 자는 것처럼 조용히 죽고 싶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작은 병 하나쯤은 달고 살게 되고, 결국 그 병을 안은 채 치료에 매달리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 나의 문제로 다가옴을 실감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웰 다잉(Well-dying)’, 즉 ‘잘 죽는 법’과 ‘품위 있는 마지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정말 ‘웰 다잉’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어렵고,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는 죽음을 앞둔 이들이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치다. 이는 조력사망과는 완전히 다르다. 조력사망은 환자 본인이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뜻한다. 나는 안락사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조력사망이라는 개념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취지가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의 고통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비록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만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삶과 마지막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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