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차 한 잔, 책 한 권

내가 생각하는 마흔이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기를 쓰고 지켜야 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지키고 싶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결국 세상은 내 의도나 계획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 그래서 모든 일이 경이로운 기적이고 감사할 일임을 알게 되는 나이.- P5
무엇보다 배움이란 자연스럽고 편안한 게 아니다. 이미 알고있던 것이 흔들리고,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자기 부정과 파괴의 경험이 배움의 핵심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힘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려는 힘 사이에서 고투하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P34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떠나가면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나랑 별 상관없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잠깐 안타까워하면 된다.- P75
상실은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P93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린 시간은 형벌과도 같았다.- P93
주말이 되어야 참았던 눈물을 마음 놓고 쏟아냈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 아직도 하루가 한참 남아 있으면 너무 막막한 기분에 또 울었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날이 저물고 있으면 너무 허무해서 또 울었다.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하든 어떻게 하지 않든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P94
우울과 무기력을 견디는 일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살아서 뭐하나, 생각하면서도 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것도.- P95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마치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통나무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무거웠다. 그러다 물 위로 다시 떠 올랐을 때 나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이를테면,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사는 데 별 이유가 없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40대의 비혼 여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P97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견딘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던 일이 갑자기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만났고 사랑했고,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는 이 불가해한 사건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 같은 종류의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정도만 되어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P103
마흔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지나온 시간을, 그리고 과거의 나를 조금씩 잊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견딘다는 의식도 없이, 견뎌야 한다는 다짐도 없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이제는 알겠다.- P103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을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일, 사랑을 이유로 내 마음과 같기를 요구하는 일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마음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열리지 않는다해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 끝내 안 열려도 그냥 거기에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리라.- P224
김수영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 그것이 산다는 일의 전부이며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사는 게 고단한 건 경사도 30%의 산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이 안 보여도 걸음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P236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