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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네
  • 제거명령
  • 빈스 플린
  • 14,220원 (10%790)
  • 2013-09-23
  • : 184

원래 무더운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보고 스릴러소설을 읽어주는 것이 국룰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같은 여름만의 문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합니다. 언젠가부터 영화사는 더 이상 공포영화를 만들지 않고, 출판사는 외국의 액션·스릴러 소설을 들여오지 않습니다. 돈이 안되니까 그런 거겠죠. 한때 장르물에 열광했던 저조차 거의 등한시하는 걸 보면 말 다 했네요. 아무튼 날씨와 업무의 여파로 인한 독서 슬럼프를, 묵혀두었던 빈스 플린의 책으로 이겨냈습니다. 여하간 미치 랩 시리즈는 언제 봐도 명불허전입니다.


시리즈의 주인공 미치 랩은 CIA에서 근무하는 대테러 요원입니다. 하지만 정식 직원이 아닌 용병이라 할 수 있는데요, 시리즈 초창기에 테러로부터 백악관을 지키고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지금까지 프리랜서처럼 활동할 수 있게 됐다죠. CIA의 일이란 게 매우 극비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언젠가 미치 랩의 대활약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타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버렸습니다. 적들에게도 그의 신상이 널리 알려져, 예전과 같은 첩보 활동이 힘들어졌죠. 허나 테러리스트를 처단하는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미치 랩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사명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를 보며 누군가는 뛰어난 직업정신이라 할 테지만 사실 그는 옛 애인을 죽인 테러범들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에요.


인물 소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야기는 사우디 왕궁의 한 인물이 랩에게 포상금을 걸고 암살 계획을 시도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랩에게 복수하겠다는 건데요, 랩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아무튼 한 중개인이 거금을 받고서 고용한 암살자가 집으로 향합니다. 랩과 아내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설치해뒀던 폭탄을 터뜨려버리죠. 이로써 랩의 아내는 사망하고, 랩도 수백 미터 날아갔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정신이 든 랩은 임신 중이던 아내가 죽은 것과,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과,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과, CIA 안전가옥에 감금된 상황 등 여러 가지로 절망과 한탄에 빠집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는 CIA와 상부기관에서 그를 가둬둔 거죠. 솔직히 랩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내를 잃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너무 막장 전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랩의 직업상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누구나 예상했을 거예요. 제가 그런 위험 직군이라면 가족을 만들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예.


위 사건이 나오기까지 진도도 느리고 이렇다 할 액션씬도 없고 해서 꽤나 지루했습니다. 초반부에 CIA를 관리할 국가정보원 신임 국장이 등장하는데요,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 야망가는 CIA를 자신의 권력을 돋보이게 할 수단으로 써먹고자 했죠. 하지만 무소속 광전사인 주인공은, 저 분탕치는 미꾸라지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캐릭터가 아녔죠. 신임 국장에게 제대로 공포심을 심어주었으나 정신 못 차린 국장은 끝까지 빌런 짓을 한다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아셔야 할 게, 액션물이 다량 첨가되어 있지만 사실 요 시리즈는 정치 스릴러인데요. 그래서 국가를 위협하는 테러집단과 더불어 내부에 숨어있는 적들과도 늘 싸워야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매번 부패한 정치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님의 깡다구가 언제 봐도 예술입죠. 그치만 이번 편은 확실히 지루했어요. 차후 스토리의 방향을 잡기 위한 징검다리 편이었다곤 해도 말이에요.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절반쯤 넘기면 랩이 복수전에 나섭니다. 랩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암살을 계획한 사우디 일행은 갱단을 고용하여 랩이 묵고 있는 CIA의 안전가옥을 기습공격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랩은 노련하게 적들을 제거해나가죠. 그리고 자신의 골드멤버들과 함께 적들을 역추적하여 묵사발 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다렸던 주인공의 통쾌한 액션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어째 너무 일방적으로 혼쭐내는 것 같아서 아쉽긴 하네요. 아무튼 미치 랩의 무너진 멘탈을 다음 편에서 어떻게 회복할지가 관건이겠어요.


이런 장르소설들은 굳이 주제나 메시지를 찾을 필요가 없어서 좋죠. 그냥 스토리만 따라가도 재미있으니까요. 하지만 머리 좋은 작가들은 꼭 인물의 고뇌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못다 한 말을 전하거든요. 이번 작품에서도 그래요. 미치 랩은 아내를 죽인 암살자를 끝내 살려둡니다.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고요, 이번 일이 무데뽀에다 다소 감정적으로 행동하던 주인공의 성질을 죽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매번 부딪히고 대립하는, 심지어 폭력을 휘두를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만납니다. 경우에 따른 처세법들이 있을 텐데 그중에 제일은 이해와 포용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는 그 점을 제대로 시사했죠. 서로 다른 민족, 사상, 성별, 언어, 이념, 문화, 관습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면 불편한 게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감정을 앞세워서 해결할 것도 아니고, 반대로 회피하기만 해서 좋아질 일도 아니니까요. 하여간 이런 장르에서조차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저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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