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러더라고요. 오마카세가 더 맛있지만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쪽은 정크푸드 같은 것들이라죠. 그 말에 적잖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독서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문학이 아무리 우수하다 한들 현대문학의 도파민은 못 이긴다고요. 특히나 스릴러 같은 장르소설은 더더욱이요. 저는 어디까지나 재미로 독서하기 때문에 장르, 형식, 시대, 사상을 불문하고 재미있었다면 그만입니다. 그게 종합예술이라는 뮤지컬 공연보다도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코미디 무대를 훨씬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근래에 묵직한 작품을 연달아 읽었더니 피로해져서 오랜만에 코넬리 옹의 작품 하나 읽었습니다. 초기 작품인 <시인>에서 활약한 매커보이 기자를 일회용으로 써먹지 않고 시리즈로 만들었더군요. 솔직히 <시인>에서는 주인공의 매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제법 정감이 가는 캐릭터로 나와주었습니다. 보니까 13년 만에 나온 후속작인데, 그만큼 여러 피드백을 반영하여 캐릭터에 힘 좀 썼구나 싶었네요. 다만 텀이 너무 길다 보니 이전 내용들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스탠드얼론처럼 읽었습니다. 물론 전개나 흐름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요. 이런 게 코넬리 옹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받는 작가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LA 신문사 ‘타임스‘의 베테랑인 주인공은 감원 대상에 포함되어 해고되기까지 2주 남았습니다. 나가기 전에 특종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빅 엿을 먹이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히죠. 그가 계획한 특종이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겁니다. 그런 보도가 나가고 나면 이제 신문사는 온갖 연락을 받으며 곤욕을 치러야 할 테죠. 저는 이렇게 사회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직업군들이 삐딱선을 타는 이야기를 참 좋아라 합니다. 아무튼. 갱단 소속의 흑인 소년이 방치돼있던 차를 몰았는데, 알고 보니 트렁크에 여성 시신이 있더랍니다. 경찰 측은 소년을 용의자로 간주했고, 압박 심문 끝에 소년이 저지른 범죄처럼 된 거였죠. 진실을 조사하던 매커보이는 매우 유사한 사건을 찾아내, 어쩌면 연쇄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슬슬 판이 커지려는 게 보이죠?
주인공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해리 보슈‘같은 공권력이나 액션이 없어 밋밋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작가는 사건 외에 다른 요소들을 집어넣습니다. 앞으로 매커보이를 대체할 후임 여기자가 들어오는데요, 깍듯한 선배 대우를 하면서도 교묘히 선을 넘곤 합니다. 더불어서 이제껏 함께 했던 타 직원들과의 믿음도 식어버리고요. 게다가 특종을 다룰수록 신문사 측에서는 퇴사 일을 조금씩 더 연장시키는 모습들도 나옵니다. ‘야비한 직장‘의 특징과 패턴을 골고루 볼 수 있다는 게 이번 편의 핵심이에요. 이로써 작가 또한 기자 생활하며 얼마나 수모와 치욕을 겪었을지도 상상이 갑니다.
유사 사건의 발생지역인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간 메커보이는 사건 담당 변호사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을 방문하다가 알 수 없는 봉변을 당합니다.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통신이 차단되고, 이메일 등의 온라인 접속이 전부 막혀버려요. 누군가가 그를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주인공은 최후의 보루를 꺼냅니다. 옛 연인이었던 FBI 요원 레이철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받게 되죠. 레이철은 해리 보슈와도 얼레리꼴레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는 매커보이와 더 깊은 관계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사건 수사보다도 견우와 직녀의 애정선을 구경하는 맛이 더 좋았어요. 스릴러소설에서 연애 씬을 더 좋아하다니, 저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한편 매커보이의 마지막 기사를 공동작업하던 후임은 덫에 걸립니다. 트렁크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어느 사이트에 접속한 뒤로 종적을 감춰버려요. 주인공들은 해당 사이트의 출처를 따라 모 데이터 보안센터를 방문합니다. 아 참고로, 범인은 이 센터의 서버 관리자입니다. 시작부터 범인의 시점이 번갈아 나오므로 이건 스포가 아니에요. 범인을 지독하게도 감춰놨었던 <시인의 계곡>에 비하면 차라리 이런 구도가 더 낫다고 봅니다. 아무튼 허탕치고 LA로 귀가한 두 사람은, 주인공의 집에서 후임 기자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경고였고, 이로써 사건의 주인공이 돼버린 매커보이는 특종을 동료 직원에게 건네주어야 했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코넬리 옹은 캐릭터 굴리기에 가히 천부적입니다.
글이 길어져 슬슬 마무리하겠습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데이터를 지켜내는 ‘허수아비‘의 단서를 따라 주인공들은 범인과의 사투 끝에 간신히 승리합니다. 그 장면은 직접 읽어보시고, 전도유망한 능력자들이 어쩌다 빌런의 길로 들어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꼭 미친 과학자들이 악당으로 나오곤 했었죠. 단순히 불우한 시절을 지나와서 그렇다기엔 증오나 집념의 정도가 너무 괴랄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다른 방면으로 재능을 펼치며 욕구를 충족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지금 보니 능력 자체가 목표인 것과, 능력을 ‘수단‘으로 쓴다는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요리를 예로 들어볼까요. 대개 남자들은 요리 자체를 잘 하는 게 목표인 반면, 여자들은 가족과 이웃을 먹이는 데에 목표를 둔다죠.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릅니다. 그 때문에 실력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뭐가 옳고 그른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무조건 선이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죄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