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 혐오의 시대이다. 2010년대 중반에 생겨난 이 현상은 2024년 현재 정점을 찍었다. 익명의 선동가들이 저질러놓은 결과임을 이제는 다들 알지만, 한번 진흙탕 싸움에 중독된 국민들은 살짝만 긁혀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해댄다. 대의와 논리를 따지는 자신을 이성적이라 믿겠지만 누구보다도 감정적인 사고와 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 ‘혐오‘에 대한 감정이 곧 자신의 열등감 및 욕망과 연관돼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괜히 꼴 보기 싫고 재수 없다 생각되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바램이 역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부를 자랑하는 사람이 싫다면 그는 누구보다 돈을 원하는 사람이며, 인싸를 극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인기를 갈망한다는 뜻. 따라서 혐오성 짙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또 거기에 현혹되는 이들은 자신이 욕하는 대상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그랬을 때 서로의 감정은 줄어들고 이성적인 자세와 태도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한 분석심리학의 관점으로 흥미롭게 읽은 그레이엄 그린의 <코미디언스>를 소개해 본다. 물론 이 작품이 그런 학문에 기반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의 이유 모를 공허와 짜증에 명쾌한 답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 배경은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이고, 파파 독(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독재 정권 시절이다. 내가 아이티의 역사를 몰라서 참고한 자료들에 따르면, 1960년대에 대통령이 된 파파 독이 공산주의자들을 처벌하고, 민병대(통통 마쿠트)를 세워 사회를 감시하고, 미국을 비롯한 타국의 원조를 끊어버리는 등 온갖 폭력과 야만이 지배하는 국가였다고 한다. 이토록 위험한 지역을 수차례 여행하면서까지 작품을 써낸 작가의 패기도 보통은 아닌듯하다. <코미디언스>에서는 아이티의 공포와 병폐를 고발하겠다는 각오로 가득한데, 정작 자신은 저널리스트(특파원)이기를 싫어했다고 하니 고발을 목적으로 쓴 작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는 말이렸다.
장기 출장을 마친 아이티의 관광호텔 주인 브라운은 귀국하는 화물선에 오른다. 그리고 탑승객인 존스 소령과 정치인 스미스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작중에서 존스는 주인공의 감정 문제를 맡고, 스미스는 아이티 사회의 문제점을 맡은 역할이라 보면 되겠다. 미국의 대선 후보였다던 스미스는 채식주의 센터 설립 목적으로 아이티 장관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다. 주인공은 파리 날리는 제 호텔에 부부를 모시고 가이드맨을 자청한다. 그날 밤, 호텔 수영장 바닥에 자살한 시신이 발견되는데, 바로 스미스 부부가 만나려 했던 사회복지부 장관이었다. 괜히 민병대와 엮일까 봐 시신을 먼 곳에 가서 버리고 온 브라운. 이후 장관의 장례식에 참석한 주인공과 스미스 부부는, 민병대원들이 와서 폭력을 행사하며 장관의 시신을 관 채로 뺏어가는 광경을 목격한다. 여기까지가 출판사의 작품 소개인데 몰입감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고딕 스릴러 뺨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축 처질 텐션을 대비해서 카페인이라도 섭취하시는 편이 좋겠다.
사랑으로 인종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던 스미스 부부의 신념은, 독재 정권의 공포 앞에 휘청이기 시작한다. 부부는 백인 사회에서 지내는 흑인들만 알았지, 흑인 국가, 특히 아이티 같은 독재국가에 대해서는 영 무지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인의 장례를 방해하고 시신을 훔쳐 가는 야만성이라니? 스미스는 인종을 초월한 자신들의 인류애에 뼈 맞고 배신감을 느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스미스를 보면서 브라운은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결국 스미스도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겠단다. 그럼에도 채식주의 전파와 센터 설립의 목적을 잊지 않았으니, 비관주의의 브라운에게는 이 성자 같은 부부가 얼마나 연구 대상이었을지. 아무튼 평생을 등골 브레이커로 살아온 브라운은 저도 모르게 이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부터가 코미디인 게, 허풍쟁이에 사기꾼인 그가 지금 누굴 위하고 무엇을 걱정하냔 말이다.
한편 정치 망명자로 알려진 존스 소령은 민병대에게 도망 다녔고, 스미스 부부와 주인공도 똑같은 백인이라며 욕을 먹는다. 악동 같은 존스를 싫어하는 브라운과 달리 누구나 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MSG 가득한 그의 자랑들도 형편없었지만, 주위에 피해준다는 자각도 없는 그의 어디가 좋냐는 말이다. 괜히 아니꼬워서 불륜 파트너한테 이상한 프레임과 헛소리들로 꼬투리 잡고 칭얼대는 주인공. 이에 파트너 왈, 현실은 상상처럼 대하고 사실은 죄다 왜곡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면서. 브라운 스스로도 제 감정이 뭔지를 몰라 하는데 이 관계에 무얼 더 바랄 수 있을까.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수도회를 빠져나와 나쁜 길을 간 과거를 생각하면, 파트너에 대한 브라운의 망상과 투정들도 그러려니 한다. 다만 파트너가 존스를 인간적으로 아주 좋아해서 문제였는데, 이유를 듣자 하니 존스가 자기를 웃게 해준다는 거였다. 존스를 좋아하는 모두의 대답들이 다 그 이유였다. 더 이상 웃을 일이 없는 이 나라에서 유쾌함을 가져다준 단 한 명이 바로 존스였음을 주인공만 깨닫지 못했다.
존스와 브라운은 동족이었다. 사생아에다 뿌리 없이 떠도는 방랑자. 그리고 지금은 흑인 국가에 거주 중인 몇 없는 백인. 그런데 어째서 존스는 망명자임에도 항상 호탕하고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것일까. 브라운만이 존스를 끝까지 미워한 것은 동족인 자신과 전혀 다른 태도도 그렇지만, 자신에겐 없는 유머감각 즉 남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현실을 연기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실패한 코미디언이라는 말이 오갔다. 그것은 파트너의 말대로 자기 연민에 빠진 싸구려 인간처럼 보인다는 뜻일까? 분명한 점은 연기하는 게 유리할 때에도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면 코미디언이 아니며, 그런 사람은 존스 소령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존스처럼 솔직하지도 못하고 파트너를 웃게 해주지도 못해 자기혐오에 빠진 주인공. 웃길 수 없는 코미디언이라니, 이 무슨 뜨거운 냉커피 같은 소리더냐. 자, 이쯤이면 매번 연기해서 회피하는 정신승리와, 불편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인간승리의 차이를 느꼈을 테다. 브라운이 존스를 혐오하는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그가 가진 유머러스함을 배워야만 한다. 돌아가신 모친의 인생관 또한 코미디를 추구했다는 점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허나 느긋하게 복잡한 감정을 들여다볼 때가 아니었다. 자살한 장관의 조카가 반란군을 모아 쿠데타를 계획하였고, 브라운의 입김으로 존스 또한 참여하게 된다. 집결 장소로 가는 길에서 그는 자신의 허풍들을 낱낱이 브라운에게 고백한다. 그건 그렇고 존스가 어째서 이 쿠데타를 거절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정치 망명자인 자신을 돌봐주고 헛소리에도 웃어준 이들에 대한 의리가 아니었을까. 고기 한 점도 먹기 어려운 나라에 채식주의를 전파하려던 스미스 부부도 존스만큼이나 무모하고 용감했다. 물론 셋 다 실패한 코미디언이 되고 말았지만 희극을 즐기려는 자세가 중요한 게 아니겠나. 브라운처럼 가슴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참 많은데, 각자의 혐오에서 벗어나와 건강한 희로애락을 만끽했으면 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느니 이딴 소리 좀 하지 말고. 글이 길어져 이만 쓰겠는데 무슨 얘긴지 대강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