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첫 장편소설인 <버마 시절>을 읽었다. 재미와 몰입감이 정말 대단하시더군. 출간 당시 막 서른을 넘긴 나이로써 생각보다 좀 늦은 감이 있는데 그래서인가, 작정하고 정치 소설을 쓰겠다는 인상을 여러 번 받았더랬다. 양측 간에 갈라치기 해대는 오늘날의 정치 기사들만 보다가 오웰의 글을 읽었더니 바보들의 행진에서 빠져나온듯한 기분이 든다. 오웰의 정치적 비판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세계를 향하고 있다. 무조건 내가 옳고 당신네들은 틀렸다는 식의 현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오웰은 중립보다도 철저하게 세력 싸움을 일으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인데, 다소 야만적인 이 방식에서 그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잘 살펴보면 오웰은 정반합 및 변증법 사고를 써서 현 정책과 방침을 양날의 검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결말, 즉 너 죽고 나 죽자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 것을 경고하는 식이다.
<버마 시절>은 오웰이 20대 때 버마 지역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경험을 토대로 썼단다. 이것은 식민지인 버마 원주민을 지배하는 영국 관리들의 이야기이다. 열명 남짓의 영국인들은 관할별로 원주민들을 통치하며 지루하게 살아간다. 뼛속까지 제국주의인 이들 가운데 원주민과 공생관계를 이어가는 플로리의 애매한 수난이 펼쳐진다. 영국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며 동료들에게 비난을 사고, 원주민들도 다른 영국인들보다 플로리를 만만하게 여기곤 하였다. 원주민을 가축으로 대하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지만 본인의 입장도 있고 해서 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하는 주인공. 그러나 이 생활도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쯤 뿅 하고 나타난 젊은 영국 여인 앞에 도파민이 과다 분비하는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낀 그녀는 그를 따라 곳곳을 동행한다. 헌데 이 남자는 저 미개한 원주민들과 동양의 문화를 왜 자꾸만 치켜세우는 것일까. 플로리는 혹시라도 자신과 결혼하게 될 그녀가 이곳에 애정을 갖게 하자는 속셈이었다. 저가 돌연변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주인공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고, 적당한 남편감을 찾지 못한 그녀는 훤칠한 헌병 하나가 등장하자 잽싸게 노선을 변경한다. 검둥이들의 반란이 날 거라는 풍문으로 파견된 헌병은 그녀와의 만남으로 시간을 때웠고, 이에 위축된 주인공은 전보다 더 삶의 의미를 잃어갔다. 한편 출세에 눈먼 현지인 하급 판사가 일으킨 원주민 폭동으로 영국인 관리들은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판사가 폭동을 막아 공을 세울 계획이었는데, 하필 플로리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해버린다. 제대로 물먹은 판사는 타깃을 바꿔서 주인공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린다. 하, 진짜 미친듯한 빌드업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역시 영국인들이 옳았다고 할지 모른다. 저 통제불능의 짐승들한테는 매가 약이라면서. 그런데 식민주의의 억압 속에 자라난 적개심의 원인 제공을 누가 해왔던가. 그들 위에 군림하며 신사 놀음을 즐기는 게 다인 그 정책의 어디를 대체 옹호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오웰이 버마에 근무하던 시기에도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한다. 이에 회의감을 느꼈을 그는 자신들의 정치 이념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질지를 훗날 이 작품으로 그려냈다. 인간이 태어나고 나라가 형성된 이래로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나와 뜻이 다르다 해서 힘으로 제압해버리는 방식은 오웰이 말하는 진흙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이 좁은 땅덩어리만 해도 얼마나 다양한 세력 싸움이 일어나는가. 다들 내 말이 맞다고만 하지, 상대의 주장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시대는 갈수록 발전하고 후세대는 날로 똑똑해져 가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은 왜 아직도 그대로인가. 그것은 각자의 이념에 어떤 맹점이 있는지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구멍 난 배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배에서 탈출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함께 침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