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스페인 소설가 사폰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나는 그 소식으로 사폰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국내에서도 제법 팬층이 있는지라 계속 관심을 두고는 있었다. 그러다 이제야 대표작인 <바람의 그림자>를 읽고서 왜 대중들이 좋아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다만 늘 그렇듯이 너도나도 빨아재끼는 작품치고 확 만족스러운 경우가 없었던 것처럼 이 작품도 그러했다. 요즘 자주 쓰이는 ‘평균 올려치기‘라는 용어가 딱 생각나더라는.
먼저 팩트 한 가지 짚자면, 이 작품은 스토리가 아닌 분위기로 승부하는 쪽이다. 뭐라도 좋으면 된 거 아니냐 싶지만 막상 읽어보면 이렇다 할 내용은 별로 없고, 또 대부분 과거형 시점이어서 현재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뭔가 바람잡이 MC처럼 애써 분량 채운다는 인상도 받았고. 뭐 그럼에도 고딕+컬트+미스터리한 아우라는 인정해야겠다. 점점 뒷심이 딸리는 게 보여서 별 하나 뺐지만.
소년 다니엘은 부친을 따라 ‘잊힌 책들의 묘지‘를 방문한다. 거기서 발견한 ‘바람의 그림자‘를 챙겨오는데, 운 좋게도 세상에 단 한 권 남은 책이라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다른 인쇄본들은 전부 회수하거나 파기되었단다. 아무튼 소설에 사로잡힌 소년은 저자인 H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책을 넘기라는 악마의 등장으로 도망친 다니엘은 뭔가 일이 꼬였음을 느끼면서도 제 호기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지하고도 강행하는 모습이 주인공답긴 하나 한 번씩 얘도 좀 맞아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친구였다.
다니엘은 웬 거지 아재와 친구가 된다. 의외로 똘똘했던 거지는 소년의 손과 발이 되어 H의 조사를 돕기로 한다. 잘 됐다 싶더니 그 거지를 쫓아다니는 깡패 같은 경감이 나타나 소년까지 위협해댄다. 아니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게 H와 연관된 이유임을 짐작한 다니엘은 마침내 H의 지인들을 만나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리고 H의 옛이야기가 차례차례 소개되는데 귀찮으니까 생략하겠다. 쓸려니까 진짜 귀찮네.
H의 지인들은 다니엘이 그와 닮았다는 말을 종종 흘려댔다. 두 사람이 평행이론까진 아니어도 비슷한 구석들이 좀 있긴 했다. 과거 H는 사랑이란 이름의 똥을 밟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다니엘도 뭐 그 같은 전철을 밟는 중이었다. 아무튼 H의 지독한 러브스토리 가운데 그 깡패 같은 경감이 등장하는데, 듣자 하니 경감의 짝녀를 H가 선수쳤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그 2~30년 전의 일로 아직도 욱하고 있다는 게 추해 보이기도 한데, H도 다니엘처럼 노답일 때가 꽤 있어서 그런지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참. 아무튼 긴 세월을 거듭한 추격과 복수전으로 끝이 나지만, 그 서늘하고 음산했던 초중반의 분위기는 쏙 들어가고, H의 과거에 밀린 주인공의 날려먹은 분량도 아쉬움이 컸다. 작품성은 좋았지만 방향성이 좀 문제였달까.
사폰이 정말 세르반테스의 뒤를 잇는 스페인 작가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제 겨우 한 작품 읽고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실례겠지만. 일단은 4부작을 다 읽어볼 생각인데 가독성도 좋았지만, 문장보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게 내 스타일이라서 그렇다. 돈키호테의 후예인 나님은 어쩌면 스페인에 태어났어야 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