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쇼의 작품은 처음인데, 신형철 평론가의 코멘트로 유명해졌다더군. 분야를 막론하고 나님은 평론가들을 썩 좋게 보지 않는데 그래서였을까, 이 작품도 그냥 심드렁하게 읽었다. 1964년에 출간된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한창 일본 학생운동이 뜨겁던 전후세대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당 활동에 진심인 부류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부류가 뒤섞인 당시 사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당원으로써 긍지를 가졌던 학생들은 1950년 이후의 각종 사건들로 점점 변해가는 당의 지도 방침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군사조직에 들어가 지하활동까지 했던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어느덧 불안감이 자부심을 앞질렀다. 그럼에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혹은 혁명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다. 결국 당을 떠나 일반인으로 살아가 보지만 텅 빈 마음속의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메꿔지질 않아 방황하게 된다. 이 작품은 청춘을 잃어버린 자들의 푸념과 하소연으로 독자를 설득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내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곱게 들어주진 못하겠더라.
나만 <노르웨이 숲>을 떠올린 건 아니었나 보다. 나님은 그 작품에도 별 셋을 주었었지. 다자이 오사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옛 일본 작가들의 사회주의 정서는 어째서 내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거장들이 꺼내는 허무, 결핍, 상실, 방황 따위의 감성은 매번 코끝을 간지럽히는 선에서 그치곤 하는데, 그것마저도 독자와 소통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 작가도 제 감정들이 정돈되지 않았는지, 무언가 떠오른 대로 일단 던져놓고서 당신 생각은 어떠냐며 억지로 턴을 넘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게 같은 글이라도 서양권에서는 화두를 물고 늘어지는 반면, 일본은 꼭 질문에 맞서질 않고 그저 회피하기에만 바쁘다.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식이랄까. 그래서 일본의 고전 작품들은 이상하게 피로하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인공 두 남녀에 대해서만 적겠다. 세쓰코는 자신의 먼 친척뻘인 후미오와 약혼을 한다. 한때 당원이었던 그녀의 과거를 들추지 않고 잔잔한 연인 관계를 이어나간 후미오는, 그녀에게 못난 놈 취급을 받으며 딸랑 편지 한 통으로 이별하게 된다. 세쓰코는 자신과 과거를 공유하지 않은 약혼자에게서 끝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통탄하였다. 사실 서로가 암묵적으로 그런 연애를 시작했고, 말 없는 동의하에 결혼까지 골인했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약혼자를 떠나며 남긴 그녀의 편지 내용은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도 어이없고 이기적일 따름이었다. 그와의 연애 중에도 좋아했던 당원을 떠올렸다며 그렇게 두 남자를 은근히 비교해댔다. 무엇보다 자신의 공허를 채우지 못했단 이유로 결혼까지 해놓고 떠나가겠다며 자신을 이해 바란다는 건 대체.
삶에 대한 정의나 이유를 찾고 싶다는 건 알겠는데, 그 많은 속내를 진작에 꺼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 눈에 후미오가 영혼 없는 인간으로 보였다 한들, 부부까지 되었으면 좀 더 솔직하게 심정을 터놓고 둘이서 해결해 볼 수도 있지 않았느냔 말이다. 제대로 된 대화 한번 없이 그저 당신은 내 마음 몰라 하고 사라지다니, 나로선 참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배려한답시고 내내 다정히 대했건만 역시 그와의 사상이 맞지 않은 탓이었을까. 그녀는 둘이서 역사라 부를 만한 것들을 만들어갔으면 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각자가 지닌 것 중 서로 결합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였다. 그래 뭐, 존중은 하겠는데 진짜 남자 보는 눈이 없구만 쯧쯧. 그녀의 편지를 다 읽은 후미오의 판단은, 세쓰코가 불만스러운 자신의 세대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고 보았다. 그 행위를 용기 있다고 본 후미오와 저자의 시선이, 오늘날의 불만스러운 사회를 탈출하고픈 현대인들에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되지 않았나 싶다. 뭐 나는 여기에 썩 동의하고 싶진 않다. 어느새 다 저물어가는 내 청춘을 생각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