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보다 고전문학을 더 높게 쳐주듯 장르소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2010년대 이후로 나온 스릴러소설들은 영 재미가 없거나 그냥저냥이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살짝 비틀고 살점을 붙여서 재탕에 재탕을 한다는 인상만 받는다. 그럼에도 읽는 재미나 있다면 다행인데 그 정도로 칭찬할 만한 작품은 정말 구경하기도 어렵다. 2015년작인 <복수해 기억해>는 변호사 출신의 저자답게 퍽퍽한 감성으로 쓴 이과형 소설이었다. 쉽게 말하면 가전제품 매뉴얼을 읽는 기분이랄까. 노력이 가상해서 별 셋 주려다가 영 성의 없는 전개와 결말에 그만 별 하나 깎아드렸다. 어째 모중석의 작품 고르는 클라스가 갈수록 떨어지는듯해?
나님은 걸작보다 망작의 리뷰를 쓸 때에 전투력이 차오르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그럴 의욕조차 들지가 않는다. 아마도 비평할 가치마저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은데 일단은 써보겠다. 10대 임산부가 납치된 시점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부모의 똑똑함을 물려받은 대신 감정의 스위치를 맘대로 껐다 켰다 할 줄 아는 희귀한 병 같은 게 있었다. 하여간 현대 작가들은 진짜 별별 설정을 다 갖다 붙이느라 고생 깨나 하는 듯. 여태껏 읽었던 장르소설의 인물 설정 중, 이건 좀 과했다 싶으면 하나같이 똥망이었다. 그도 그럴게, 신박한 캐릭터를 짜내느라 스토리 구상은 뒷전이 돼버리니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얼레, 점점 전투력이 솟아나는듯해?
폐쇄 건물 감옥에 갇힌 주인공 리사. 그곳의 담당 간수는 음식을 대령하고 험한 말 뱉는 게 다였다. 리사는 쫄지도 울지도 않고 차분히 슬기로운 감옥생활을 보낸다. 방안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탈출 도구로 지정하면서 도망칠 계획을 구상 중인데, 적절한 타이밍은 안 보이고 남는 건 시간이다 보니 가전제품 매뉴얼 같은 TMI를 연달아 읊어댄다. 리사가 워낙 감정이 없는 데다, 별다른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아 스릴감이 제로에 가까웠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이건 뭐 소문조차 난 적도 없었네?
한편 바깥에서는 FBI 이 인조가 납치된 10대 임산부들을 찾고 있었다. 남자 요원은 시력이랑 기억력이 좋고, 여자 요원은 후각과 청각이 좋다는 설정인데, 그런 얘기만 늘어놓느라 정작 수사 다운 장면은 거의 나오질 않는다. 뭔가 꼬리를 밟은 듯도 한데 딱히 FBI가 뭘 하는 게 없어서 그냥 엑스트라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무튼 가만히 있으면 리사가 알아서 탈출하고 경찰에 연락하고 범인과 대치하고 끝난다. 놀랍게도 이게 전부다. 이것은 독자기만이나 조롱 수준만도 못하다. 그나마 주인공이 뱃속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또 다른 임산부 소녀를 만나면서 스위치가 켜지고 잠깐 동안 감정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대로 돌아오는 리사를 보며, 감정 선의 빌드 업은 뭐하러 한 건가 싶더라. 이 작가는 기초 플롯부터 좀 배우셔야겠던데?
좀 더 찰지게 욕하고 싶은데 이제는 예전만큼 쓴소리가 안 나온다. 성격이 죽은 건지, 필력이 죽었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이번 독서로 옛것이 좋은 것이라는 꼰대스러운 생각이 자리 잡아버렸다. 출판사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후진 작품을 기획물에 끼워 넣는 건 쪼까 거시기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