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의 청중이 보기에, 고루한 아리스텔레스주의 철학자는 수학자만큼이나 ‘전문적인‘(따라서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P256
1608년 무렵 갈릴레오는 군용 컴퍼스를 발명하더라도(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궁정의 고위직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컴퍼스는 성채축성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상당수 끌어모으기야 했겠지만, 궁정 수학 교사의 자질보다 본인의 이미지를 기념하는 일에 더 정신이 팔린 위대한 군주가 그를 탐낼 만한 가신으로 여기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곤차가 가문은 컴퍼스 선물에 감사를 표했고, 메디치 가문 또한 컴퍼스 사용법을 설명한 책의 헌사를 반겼다. 하지만 두 가문의 어느 군주도 갈릴레오가 원하던 직위를 하사하진 않았다. 바로 그때 갈릴레오는 수학 교사나 군사기술공이 아닌 신사로서 궁정에 입성하려면 컴퍼스보다 기계적 성격이 덜한 선물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P269270
과학적 경이를 궁정 담론으로(혹은 목성 위성의 사례처럼 특정한 가문의 담론으로) 번역한 갈릴레오의 작업에서 새로웠던 것은 자연철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궁정 바깥의 활동일 필요는 없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군주의 권력 이미지와 연결함으로써 그것들을 정당화했다는 사실이었다.- P273
그러므로 시선을 ‘끌어당겨‘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향상시키는 능력은 궁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이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정 에티켓은 지위와 정체성의 미묘한 협상을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도록 끌고 가는 틀이었기 때문이다.- P275
앞서 언급했듯이 절대군주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듯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였기에 그들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자기표현은 신하로부터 받은 선물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는 군주들의 주장을 정당화했다.- P283
갈릴레오는 《별의 전령》 헌사에서 그 에티켓을 상세히 설명했다. 절대군주와 독점적 후원 관계를 다지는 데 관심이 있는 가신은 본인의 선물을 실제로는 선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군주에게 속했던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책략에서 포틀래치의 특징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신은 군주에게 도전한다거나 답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관대함과 사치라는 귀족적 기풍을 군주와 공유하는 척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가진 제일 소중한 것, 즉 발견의 저자권까지 버릴 정도였다. 갈릴레오의 ‘자기 지우기‘는 궁정인다운 무심함의 몸짓이 극한까지 이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군주를 상대하는 영웅다운 도전자가 아니라 ‘자기를 지우는 영웅다운 인물‘로 스스로를 내세웠다. 그렇게 ‘저자적 순교authorial martyrdom‘를 자처함으로써 그는 ‘영웅다움‘의 목적이 군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기리는 것임을 강조하여 자신을 군주와 같은 부류로 내세울 수 있었다.- P284
갈릴레오의 발견이 별에서 온 징조(별의 소식)가 되려면 그에게는 별의 사자ambassador, 즉 대공의 철학자라는 지위가 반드시 주어져야 했다.•
•108 마찬가지로, 갈릴레오가 메디치가에 선물한 망원경은 과학 도구이자 일종의 가문 기념물이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코시모 2세에게 망원경과 함께 《별의 전령》 헌정본을 보내면서 그 거칠고 조야한 도구는 지금 상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썼다. "그토록 위대한 발견을 이룩한 바로 그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대공은 세련되어 보이는 망원경을 더 많이 받게 되겠지만, ‘그 순간 그곳에’ 있었던 것은 자신의 망원경뿐이라고 말이다(Galileo Galilei, Sidereus Nuncius, or The Sidereal Mesenger, trans. Albert Van Helden 2nd edition, pp. 297~298). 모든 망원경 중에서 그것만이 특별한 현장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것만이 단순한 망원경이 아닌 전령nuncius이었다.- P286287
갈릴레오는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사용했다. 메디치가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얻을 수 있는 밑천을 활용해 외부의 신뢰를 확보했고, 그렇게 끌어낸 동의를 활용해 메디치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자신의 발견을 그들의 이미지와 연결했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 갈릴레오는 서서히 자신의 마차를 메디치가에 동여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권력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몇 달이 지나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된 갈릴레오는 메디치의 영광을 누리는 공식 대사로서 로마로 향할 수 있었고, 그의 발견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대공이 갈릴레오의 로마 방문을 승인했음을 알리는 빈타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갈릴레오의 발견과 메디치 가문 이미지의 공생관계는 마침내 확립되었다.- P294
한편 갈릴레오 같은 대학의 수학자들은 그들과 철학자 간의 지위 격차에 맞닥뜨린 상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지위의 격차는 수학을 도구로 활용해 자연현상의 물리적 차원을 연구하는 실천의 정당성을 격하시켰다. 따라서 장인들이 군주의 권력 신화를 회화와 조각과 건축으로 표현하여 아카데미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 가문의 상징으로 표현하여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변모했다. 궁정은 과학 아카데미는 아니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제공하여 ‘철학자로 변모한 수학자들‘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기관이었다. 분과학문 간의 위계와 기존의 사회기관 그리고 사회문화적 변화의 패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에게 가장 유망한 선택지는 바로 궁정이었다. 비록 문제가 있는 선택지였지만 말이다.- P330
갈릴레오가 궁정의 기존 분류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회직업적 정체성이 새로운 종류였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그에게 부합할 만한 범주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메디치 궁정에서 갈릴레오가 경험한 것과 같은 특권적 주변성은 새롭고도 유례없는 사회직업적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서 필수적인 단계였다. 그는 대학의 수학자는 물론이고 군주의 별점에 쓸 천문표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궁정수학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에서 확보한 궁정직은 두 가지 전문직업적 정체성의 이점을 전부 가지면서도 그것들의 많은 결점은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피렌체의 명예 궁정인이었다. 특권이 있으면서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사회직업적 공간이 갈릴레오의 활동 영역이었다.- P336337
르네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정연하고 일관된 사고를 하는 철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오늘날 몇몇 역사학자와 과학철학자도 그의 평가에 동조한다) 갈릴레오의 연구가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지적 태도보다는 궁정의 보상 체계 탓이었을 수 있다. 갈릴레오가 활동한 궁정의 환경을 고려하여 나는 그의 과학이 ‘상연적performative‘이었다고 말하겠다.- P344
갈릴레오가 그러한 태도를 사적인 메모나 옹호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보였다는 사실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원인과 자신의 탐구 범위를 넘어서는 원인을 구분하는 태도가 권력의 표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갈릴레오 자신도 소유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권력이었다.- P424425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수학자가 물리적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지 않았고, 만일 그러한 탐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분과학문 간에 확립된 위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갈릴레오의 가정과 물리적 원리가 틀렸거나, 실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틀렸다고 할 때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적 범주에 맞지 않음을 지적했다.- P433
《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희생시켜 웃음을 유발하는 일종의 내부자 농담insider’s joke이었다. 갈릴레오에게(혹은 그의 논쟁 방식에 반영된 문화에) 이미 동조적인 독자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그레도나 살비아티와 동일시하는 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비웃게 하는 기능이었다. 《대화》는 비록 제목은 ‘대화‘였으나 사실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18 《대화》를 읽은 후 캄파넬라는 갈릴레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심플리치우스[심플리치오]는 철학적 회극의 웃음거리로군요. 그 남자는 그들 학파의 어리석음, 말하는 방식, 비일관성, 고집스러운 태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P453
철학자들이 수학적 가설의 물리적 실재성에 대한 수학자들의 주장을 사전에 일축한 것은 두 분과학문 간에 발전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위계적 환경을 고려하면,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언어를 배우거나 그들의 물리적 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P465466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수학자들에게 정합적인 천문학뿐만 아니라 더욱 긴밀하게 통일된 강력한 사회직업적 정체성까지 모두 발달시킬 수 있는 ‘교리‘를 제공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겠다고 약속했다. 태양중심설은 우주에는 정합성을, 천문학자들에게는 전문직업적 결속력을 가져다주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여기며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P471
철학자들은 수학적 무지에 대한 갈릴레오의 공격에 매우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그들은 그 공격에 답하려 시도함으로써 그것을 문제로 삼아 버리는 상황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코레시오는 부양성을 다루는 수학이 너무 단순해서 갈릴레오의 논증을 파악하고 배격하기 위해 수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수학에 대한 무능을 인정하기는커녕 수학을 배척하려 했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51 코레시오는 그 자신이나 동료들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역량을 옹호했다. "그 당시에는 철학 학생들이 수학적 학문들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그 학문들을 먼저 공부하기 전까지 논리학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플라톤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최고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에 대한 지식 없이 [플라톤의 학교에] 발을 들었을 수 있었다고 어느 누가 믿겠는가?"- P476477
요컨대 수학자들은 계속 퍼즐을 풀면서 전통적인 수학의 경계 내부에 남아 있거나, 갈릴레오처럼 철학자들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퍼즐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점진적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헌신하게 된 데에는 그의 독특한 사회적 위치와 배경과 계층 이동, 그리고 그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 관한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 본인에게도 비슷한 고찰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P490
도덕주의는 공약불가능성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P493
서로 다른 우주론 및 사회적 기관/제도와 연관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사회직업적 문화가 부양성이라는 사소한 문제 뒤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자들이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담긴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배운다는 것, 또는 수학을 자연에 대한 물리적 설명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래는 종속적이었으나 이제 외부의 침입자로 변한 ‘타자‘의 언어를 학습한다는 뜻이었다. 이 결정에 수반되는 제도적·권력적 측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자멸을 권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P496
원론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기구의 사용과 그로부터 얻은 증거에 대한 믿음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수학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 이론으로는 망원경의 작동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증거를 만드는 기계라는 관념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양립하지 않았다. (체사레) 크레모니니Cesare Cremonini가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하고 1613년 출간한 《하늘에 대한 논쟁Disputatio de coelo》에서 갈릴레오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은 것(그리고 피사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갈릴레오의 물리적 원리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과 똑같은 정체성 유지 동역학이 작동한 결과였다. 갈릴레오가 제안한 것(그리고 그들을 위험한 것)은 단순한 부양성 이론과 망원경이 아닌 새로운 철학적 ‘삶의 형식‘이었다.- P494
결과적으로 이중언어를 단순히 언어의 개념으로만 본다면 지적·전문직업적 선택의 바탕에 놓인 정체성 형성과 유지의 동역학을 간과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의 함의가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직면한 것만큼 극단적이란 법은 없더라도,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 또다른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수용을 의미한다면 이중언어자가 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을 겪는 셈이다.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 다른 시각으로 동시에 같은 대상을 본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분산된 관점을 갖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비소통적 행동은 공약불가능성의 필연적 원인은 아니지만(공약불가능성을 산출하는 본질적인 원인은 없다) 어휘 구조를 심화하는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공약불가능성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통불가능성과 공약불가능성의 관계는 (양쪽 방향 모두) 인과적이지 않지만 과학적 변화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심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P508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