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무라) 리도는 실크해트를 벗어 거기서 비둘기 다섯 마리를 잇따라 꺼냈다. 무슨 감자라도 캐는 듯했다. 리도는 실크해트에서 꺼낸 비둘기를 담담하게 무대에 풀어놓았다.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했다.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아시겠습니까? 비둘기를 꺼낸다고 선언하고 비둘기를 꺼낸들 누구도 놀라지 않죠." (마술사)- P1011
마술은 연출이 전부다.
지금은 나도 잘 안다. 물론 기술이나 트릭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잘 살려내는지는 연출에 달려 있다. 연출을 잘하면 시판되는 마술 도구로도 사람들은 놀라고, 연출이 서툴면 고도의 기술을 써도 쇼는 망한다. ‘지금부터 공중으로 떠올라보겠습니다‘라 말하고 공중에 뜨기만 한 내 무대가 프로 마술사인 누나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공중에 띄우기 위해 필요한 연출을 해야 했다. (마술사)- P15
작가가 되고 오 년째 되는 해 가을, 십오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교토 병원에서 아버지가 말기 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사후 수속에 관해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갔다. 오 분 정도 병실에 얼굴을 비쳤다가 병원에서 나와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한 줄기 빛)- P51
아버지의 글씨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처음 산 자전거에 아버지가 내 이름을 써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유성 매직펜으로 새 자전거의 흙받기에 내 주소와 이름을 썼다. 왜 그런지 그때 아주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년 뒤 깜박 잊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는 바람에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다. 자전거의 색깔도 모양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쓴 내 이름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분명히 자전거에 ‘도카이 데이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억한다. 도카이 데이오가 우승한 아리마 기념에서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왔다. (한 줄기 빛)- P58
플로리스 컵은 1907년 마필 개량을 목적으로 미쓰비시 재벌의 고이와이 농장이 영국에서 수입한 서러브레드 20두頭 중 하나다. 청일 및 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 육군은 군마의 질이 서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일본에서 말은 주로 감상이나 의례용이었고 군사 작전에 쓸 일이 없었다. 당시 국내산 말은 키가 작고 성미가 거칠어 전쟁터에서 해가 됐다. 가령 1900년 의화단 사건에서 ‘일본은 말처럼 생긴 맹수를 탄다‘라고 열강에게 비웃음을 샀을 정도다. 그 때문에 질 좋은 말을 생산하고자 거국적으로 경마 육성에 주력했다. 플로리스 컵은 바로 그런 시기에 수입된 영국의 서러브레드였다. (한 줄기 빛)- P59
남은 것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스 캐넌의 딸뿐이었다. 딸을 보여달라‘라는 (마미야) 쇼지로의 말에 브로샤르는 당혹했다고 한다. 아비를 모른다‘라는 말은 서러브레드에게 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서러브레드는 혈통이 전부다. ‘부모가 모두 서러브레드‘여야 서러브레드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혈통 등록이 시작된 18세기 이후 모든 서러브레드는 혈통서와 함께 관리되고 있다. 그 관리에서 벗어난 말은 서러브레드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소지로는 딸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한 줄기 빛)- P62
레티시아의 첫 새끼는 580엔이라는 비싼 값에 팔렸다.
경매 시장에서 육군 장교가 첫눈에 반한 탓이었다. 메구로는 3세대 전에 아랍종의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장교는 그 사 실을 알고 더욱 만족했다.
생산한 말이 군마로 징용되는 것은 말 생산업자에게 더없는 명예로 간주되었다. 검사소로 출발하는 날, 레티시아의 새끼는 군기軍旗를 짜넣은 천을 덮고 지역 주민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았다. 농장에는 무수한 일장기가 휘날렸다. 다른 군마와 함께 만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했다.
쇼지로는 울었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군마로 징용되는 명예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일본 더비에서 우승할 말이었다. (한 줄기 빛)- P77
쇼지로는 또다시 메구로에게 가장 알맞은 상대를 찾아 씨암말을 사러 두 번째 유럽 여행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거센 전화戦火로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3년에 정부가 경마 중지를 발표했고 이 년 뒤 도쿄 경마장은 식량난 해소를 위해 고구마 밭이 됐다. 다른 몇몇 중소 목장과 마찬가지로 마미야 농장은 경영난에 처해 전쟁이 끝난 직후 폐쇄됐다.
쇼지로는 서러브레드 몇 두를 매각한 돈으로 목장을 ‘마미야 승마 클럽‘으로 개조했다. 씨수말에서 은퇴한 메구로도 숭마용 말 중 하나가 됐다. (한 줄기 빛)- P87
우리가 사는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곧 현재입니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라는 상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모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일단 저는 이 모순에 대해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모순을 해결하는지는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모순 자체가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셨다는 뜻이겠지요. 그 또한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시간의 문)- P99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점은,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늘 알기 쉬운 위치에 있다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문‘에 관한 한, 과거가 바뀐 것도, 과거를 바꾸었다는 사실도 배경이 아닙니다.
배경은 세부에 깃듭니다. 그리고 그 세부가 과거를 바꾼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거듭해서 말씀드리는 ‘대가‘입니다. (시간의 문)- P117118
장대한 효론의 전주에 트럼펫이 들어왔다. 차분하게 확장되는 곡이다. 중반에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뒤 안정되어 밑음으로 끝난다. 음높이 변화도 없이 완만한 멜로디가 두 번 반복될 뿐인 단순한 구성이었다. 도중에 조바꿈하면서 8분의 6박자로 바뀌는 부분이 작은 악센트일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예의 바른 느낌이 있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음대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고지식한 청년이 자신의 가치관을 모조리 쏟아부어 만든 것 같은 곡이었다. (무지카 문다나)- P140
모모야마는 문화를 사랑했다.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패션도, 미술도 모두 좋았다. 자신은 어째서 문화를 사랑하나. 모모야마는 ‘불필요해서 라고 생각했다. 문화가 없다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저출산 고령화 경향은 멈출 줄 모른다. 일본 경제는 쇠퇴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접함으로써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감동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런 기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문화 덕택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P179
나가노 출신인 모모야마는 내내 도쿄를 동경했다. 일 년에 한 번 친구와 함께 완행 첫차를 타고 도쿄에 갔다. 시부야,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아오야마를 돌며 용돈과 세뱃돈을 털어 옷이며 신발, 시디를 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는 모두 미인이고 남자는 모두 멋있어 보였다. 딱 한 번 익숙지도 않은 헌팅을 했다가 "도쿄 사람 아니구나?" 하고 웃음을 샀다. 창피했지만 역시 자신들은 촌티가 나는구나 하고 납득했다.
상경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해 도쿄에 있는 사립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막상 도쿄에서 살게 되니 시부야나 하라주쿠에 거의 가지 않게 됐다. 기술의 진보에 의해 옷이나 신발은 인터넷으로 살 수 있었고 음악은 클릭 한 번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점원에게 추천을 받는 일도, 시디 가게에서 몇 시간씩 청음하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게 원클릭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P184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