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SF’의 정의를 너무나 대충 잡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과학 지식이 좀 더 깊고 정확하게 서사와 결합한 SF가 ‘하드’ SF일 것이란 수준의 얄팍한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하드 SF에 관한 내 엉성한 정의와 이 단편집 속 작가들이 생각하는 하드 SF가 어떻게 겹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큰 재미였다.
“사적인 이야기가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 궁금합니다. 무아레 현상과 플랑크 단위에 대한 논문 말입니다.”
“오. 세상에! 가족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30년 전에 쓴 학위 논문까지 들추겠다는 건가요? 대체 이 늙은이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뭐죠?”(남세오, 벨의 고리) -102쪽
이산화 작가의 ‘마법사 에티올의 트루 엔딩 퀘스트’는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세계의 평화라는 퀘스트를 달성한 게임 ‘제브라시아 모험기’ 영웅들이 어째서 후속편에서는 그렇게 처참하게 변질되고 말았는지 그 원인을 이 게임 캐릭터를 분신처럼 여기는 현실의 게이머가 최근 과학의 연구들을 근거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남세오 작가의 ‘벨의 고리’에서는 양자역학의 새로운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시상식장의 물리학자들 앞에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한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과 비슷한 얼굴인데서 비롯된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진다. 이처럼 이 책은 과학을 더 깊이 바라보고 끌어들이는 현재 한국 SF의 방향과 양식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보여준다. 이런 분산된 일관성이야말로 현대 과학의 성격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 단편집이야말로 하드한 SF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바다의 표면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색일까? 어떻게 움직일까? 하랑은 머릿속에서 논리를 지우고 낮추고 직감과 즉흥에 상상의 광경을 맡겼다. 그러자 검푸른 액체로 된 산과 언덕, 계곡이 나타나서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얼음이 사라진 바다였다. 새파란 산이 언덕 위로 무너지고 계곡이 갈라질 때마다 새하얀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먼지일까? 얼음? 자그만 공기 방울?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광경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랑은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상상 속 바다의 표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표면을 찢고 나와 공기 중으로 솟아 오른 것은 거대한 세뿔고래였다. (해도연, 거대한 화구) -196~197쪽
이 단편들을 쓴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과학의 밀도를 높인 서사를 들려준 덕분에, 과학을 소설로 쓰는 것과 이른바 과학 소설(SF)를 쓰는 것이 어떻게 다를 수밖에 없는지도 보다 선명히 보였다. 서사를 과학에 이용하는 것과 과학을 서사에 이용하는 것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차이는 설명력의 한계도 분명하다. 해저에서 생존하도록 진화한, 지상에서 생존했었다는 사실도 잊은, 지구가 아닌 행성의 미래 인류가 다시 땅을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기까지의 그 과정과 그 인식하는 순간의 경악과 경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해도연 작가의 ‘거대한 화구’ 같은 작품은 서사의 설득력과 치밀함을 위해 과학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온다.
어떤 과학적 사실보다도 어렵고, 직시하기 곤란할 때조차 있는 과학을 충분히 알아도, 혹은 알아서, 그 과학의 가정마저 철저히 부인하는 인간의 한계야말로, 과학이 있는 까닭에 인간들이 서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밑바닥이다. 과학이 있어도 없는 취급당하거나 있으나마나한 존재처럼 보이는 이 역시 과학의 핵심이다. ‘거대한 화구’처럼 결국 그런 어거지를 뚫고 나가는 힘 역시 과학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땅에서 살 수 있을 리가, 살았을 리가 없다는 악다구니는 과학의 일부인 셈이다.
서사가 승한 SF는 물론 좋다. 서사가 승한 바로 그 이유로 좋을 수밖에 없다. SF의 서사가 승해도 그것이 꼭 과학에 박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이 책 덕에 생각했다. 서사가 승한 SF가 있는가하면, 서사처럼 과학이 함께 승한 SF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야기만의 각별한 감각을 보여준 단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