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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테카 라우렌치아나
세포라는 정합성
로렌초의시종  2025/02/02 23:00
  • 하나의 세포로부터
  • 벤 스탠거
  • 22,500원 (10%1,250)
  • 2024-09-30
  • : 3,316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당연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는 경험은 흥미롭다.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사실에 마땅한 당연함을 부여하는 과정 자체가 우선 흥미롭거니와 그 과정에서야말로 이 당연한 사실들 사이사이의 여전히 당연하지 않은 지점, 즉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지점이 잘 드러나는 덕분이다.

 

 인체에서 세포라는 존재들의 역할, 그 복잡한 역할들을 인류가 규명해 온 지난한 역사, 무엇보다 인체라는 유기체가 결국 단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 이 사실에서 비롯한 인체와 세포, 생명 현상의 특성, 그 본질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당연해지기까지의 과정 간의 상호 작용, 이 세 기둥—세포의 역할, 세포 연구의 과학사, 하나의 세포로 귀결되는 인체 발생의 원리와 이 원리를 규명한 과학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이 책을 지탱하고 있다. 안다. 지금 저 앞의 문장이 너무 길다.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하나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는 발생이 유럽식 계획과 미국식 계획 중 한 가지 방식을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식 계획에서는 계통lineage이 모든 것이므로 세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서 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반면 미국식 계획은 보다 평등주의적이어서 세포의 출처sources보다 위치location가 더 중요하다. 브레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식 계획에서 세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반면 미국식 계획에서는 “이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브레너의 은유는 가소성과 그 반대 개념인 전념성commitment의 차이를 드러낸다. 계통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포(유럽식 시스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궤적을 위해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반대로 그러한 제약 없이 태어난 세포(미국식 시스템)의 경우, 선택지가 열려 있어서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된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로, 그 균형이 발생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 쪽으로 기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포도 나이가 들면서 그 방식이 고정되는 셈이다. -51~52쪽

 

 이렇게 세포에 대한 ‘당연한’ 과학적, 역사적, 인식적 성과를 인상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는 이 책에 상투적인 의미에서 경이로운 사실은 찾기 어렵다는 의미도 띤다. 이런 측면은 저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가 이미 당연한 요소들을 이토록 집요하게 교차시킨 이유도, 경이롭다고 수식되는 사실들이 그 자체로 충분히 상투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서다. 이 책은 진정한 경이로움은 이미 당연한 것들 사이사이에 오래전부터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런 관점의 상투성이야말로 누구나 기꺼이 경이롭다고 받아들이는 사실에 내재된 상투성보다 지적하기 편할 뿐이다. 발생생물학에 관한 세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적을 감수했다. 이 정도의 전문성을 지닌 저자가 자신의 경력보다도 대중적 필요를 위한 작업에 이 정도의 공을 들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포의 생물학적 역할, 이 역할을 규명해 온 과학사, 인체 발생이 근본적으로 단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 이 사실을 밝힌 과학의 상호 작용의 세 축은 그 하나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이미 그런 책은 많이 나왔고, 또 나올 것이며, 아마 큰 주목을 받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대중 독자들이야말로 그런 하나의 주제만으로는 세포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지식의 한계를 고려해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지만 모든 주제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주제를 둘러싼 여러 관점을 수렴시켜야만 비로소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세포가 그렇다. 하나로써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세포가 결국 단 하나만 되거나 여전히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세포로 나뉘는 현상, 또 그렇게 나뉠 수 있는 원리, 이런 사실 자체를 몰랐을 때 겪는 직관적 어려움을 넘어서 세포와 발생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을 아울러야만 세포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 현상, 원리, 과정을 각각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세포에 관한 이 주제를 왜 읽어야 하는지 독자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단지 그렇게 쓰는 사람이 편해질 뿐이다. 반면에 이 책은 세포의 생물학적 역할과 그 역할을 규명한 생물학자, 과학사를 교차시켜서 서로의 의의를 직관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해 냈다.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배순세포가 가진 힘을 포착하기 위해 이 작은 조직에 형성체onganizer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유도현상이 발생학의 핵심 개념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1935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제자 (힐데) 만골트Hilde Mangold는 노벨상 수상에 참여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보지 못했다. 1924년 9월, 부엌의 휘발유 히터가 폭발하면서 만골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였다. -51쪽

한편 제임스 틸James Till은 (어니스트) 매컬러Ernest McCulloch와 완전히 다른 경로로 OCI(온타리오 암 연구소)에 들어왔다. 틸은 매컬러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으며,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해야 했던 서스캐처원의 농장에서 자란 덕에 강인하고 집중력이 강했다. 대학 시절 뛰어난 분석력으로 교수들의 관심을 모았던 그는 졸업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예일 대학교의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를 마친 뒤에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의 뿌리는 북부에 있었으니, 해럴드 존스Harold Johns로서는 어렵지 않게 틸을 캐나다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매컬러과 함께 줄기세포의 비밀을 풀어나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도, 제임스 틸은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작물 수확을 도왔다. -246쪽

 

 가치 판단이나 취향의 영역과는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분야인 까닭에, 대중 과학서는 그 책을 읽기보다 그 책을 말하기가 어렵다. 이해했다거나 동의했다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다만 언급 가능한 여러 사례 중 특정한 사례를 제시했을 때, 저자의 그 선택에 대한 인상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는 없거나 매우 작을지라도, 최소한 가능은 하다. 하나의 세포에서 인체라는 유기체가 발생, 기능하는 원리를 탐구해 온,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든 서로 관계를 맺는 여러 과학자의 삶 속에서 그들의 연구와 밀접한 개인적 배경을 이 책은 적확하게 짚어준다. 이 책의 굵은 세 기둥에 비하면 전체 구조의 일부에 새겨진 무늬에 가깝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발생생물학이라는 전체 구조에 엄연히 존재하는 개별성과 우연성을 상기시키는 사례들이므로 설득력이 있다. “슈페만과 만골트는 세포 간 대화의 기초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보편적인 대화가 ‘신호전달 경로‘—초기 배아의 형태와 패턴을 조절하는 일련의 ‘진화적으로 보존된 분자들‘(5장 참조)—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206쪽)거나 “틸과 매컬러와 베커는 줄기세포를 분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이는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이 분야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263쪽)는 현재의 발생생물학이 학문적 필연성라는 구조와 개인적 우연성의 간섭 속에서 형성됐음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기초연구에 대한 대부분의 자금은 국립보건원에서 제공되는데, ‘모듈형 R01 보조금modular R01 grant’이라는 기초 자금 지원의 수준은 1999년 이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이는 발견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에 텅빈 지갑을 손에 들고 있는 꼴이다. 부족분 중 일부는 자선 활동으로 채워지고, 제약업계는 소규모로나마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금 격차를 메우기에 충분치 않아 기초연구 수행 역량이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세상에 나온 기본적인 발견의 혜택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행해지지 않은 발견이 사회에 미치는 비용은 측정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385쪽

 

 중견 발생생물학자인 저자가 단발적인 대중 강연의 수준을 넘어서, 일반 대중을 위해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해 이 정도로 공을 들여 저술한 핵심적인 이유는 책의 말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밀도, 지향의 영미권 대중 과학서에서 낯익은 구성이기도 하다.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의 필요성을 시민이자 납세자인 대중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지원 확대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목적이 크겠지만, 기존의 공적 지원이 축적한 성과를 지원의 주체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헝가리 출신 미국 이민자인 커리코 커털린이 미국에 자리를 잡은 후, 미국 국립보건원의 자금 지원에서 번번이 탈락했다는 일화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지원 규모의 축소는 물론이고 기준 역시 더욱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지원 확대를 사회적으로 호소하는 이런 저술은 소명 의식이나 사회 환원보다도 현실적인 절박함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당장의 효과가 크지는 않을지라도, 전문가다운 경험, 관점, 고민을 전공 밖의 대중에게 전하는 데서 시작하는 정합성이야말로 기초과학, 그중에서도 발생생물학 그것도 세포가 주제인 이 책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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