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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테카 라우렌치아나
스키마와라시
로렌초의시종  2024/08/05 22:11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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