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의 언어로 된 책을 그대로 읽지 못하고 번역본을 읽을 때는 번역자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진다. 더구나 소설의 경우 있는 그대로 번역을 했을때 한글로 된 문장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어떤 한글을 써서 그 문장을 다듬어 내는지가 아주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믿고 읽는 몇몇의 번역자 님들이 있다. 이 책도 낯선 작가였지만 내용도 막 끌리는 건 아니었지만 번역자님의 안목을 믿고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어본다. 엄청나게 많이 운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길지 않은 페이지를 빠르게 읽었다. 나는 번역자의 감상과는 조금 달랐다. 눈물은 단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치매환자의 머릿 속을 들여다 보기 어려우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나니 대충은 그래도 이해는 하겠다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뇌가 망가졌다 하더라도 그들도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생각이라는 걸 하겠지 그랬는데 오래 전 일들과 지금의 일들 그리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들을 조금은 알겠다. 그것은 아마도 케어 매니저 일을 했던 작가의 앎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케이 할머니는 치매다. 기저귀를 차고 어성거리며 걸어다니는 돌봐주는 사람이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고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 그런 할머니다. 가족은 있지만 혼자 사는 것으로 보인다. 치매 환자라 하더라도 마구 남을 괴롭히거나 포악하지는 않은 성정이고 혼자서 일어나기고 버겁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그런 할머니다. 치매 환자 중에서도 가장 양호한 케이스가 아닐까.
그런 할머니의 지금과 과거를 오간다. 아이가 어려서는 이런 일이 있었지 오라버니는 이런 걸 해줬었지 어떻게 살았었지 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현재 그녀의 곁에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 듯이 보인다. 밋짱이라고 통칭하는 돌보미들이 있을뿐. 왜 밋짱이라고 부를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딸의 이름이었다. 어려서 떠나보내야 했던 딸을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조곤조곤 이야기는 전개된다. 결코 지루하지 않다. 환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그것을 보호자들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 고통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도 그런 점은 몇번 반복되지만 그것이 결코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닌 것이다. 가케이 할머니의 인생은 재봉틀과 금붕어라는 두 단어로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인생은 어떤 단어로 비유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