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단편이란 것을 알고 한 두편만 보고 자려고 했었다. 짧게 끊어지는 이야기의 장점이다. 처음 읽는 작가의 책이다. 맛보기로 처음 이야기인 <미란다 원칙>을 읽어본다. 사회복지사인 한 남자의 이야기.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모시는 한 남자가 있다. 무슨 관계일까. 자신이 알고 있던 혈액형이 갑자기 바뀐 이야기하며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앞에 나온 그 남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말에 머리속에 있던 징이 징~하고 얻어맞은 느낌이 든다. 이거 분명 미스터리 아니었는데 그냥 한국 단편 문학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좋은 맛을 느끼며 시작한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린 이야기 중 가장 긴 <천사들의 도시>까지 읽어버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 전에 책을 덮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다시 펴고 읽은 이유도 있다. 그 이후 결국 새벽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읽고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마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다면 진작 졸려서 잠이 들지 않았을까. 나의 불면증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 책이기도 하다.
천사들의 도시는 필리핀의 한 도시가 배경이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미국의 엘에이가 배경인줄 넘겨 짚었다. 처음에 필리핀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는데도 말이다. 중고차 판매장을 운영하는 한 남자.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민비자를 받지 못했다. 서류를 벌써 다 내놨는데 그들의 처리가 늦은 것이 그 이유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계속 오래동안 이른바 떡값을 받아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답답한 것은 그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러려니 한다. 이 역시도 처음 이야기처럼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결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단편을 별로라 하는 것은 짧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들을 욱여 넣느라 이야기가 조금은 추상적이고 뜬금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서 또 뭐 그리 어려운 말들을 주워 섬겼는지 내가 문해력이 달리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픈된 결말이 많았다. 하지만 작가 한지수의 이야기는 달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결말을 투척함으로 인해서 단편 속에서 반전을 던져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학성을 분명 내포하고 있는 문장들이건만 난해하지 않고 이 문장을 어디선가 꼭 써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문장들이다. 그래서 읽는 재미를 더하고 속도를 붙인다.
<배꼽의 기원>도 나름 특이한데 여자의 자궁이 주인공이 되어 그 몸의 주인을 당신이라고 칭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여자들은 더욱 공감할 이야기이지만 남자들에게는 약간 결을 달리 하는 이야기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궁이라는 장기가 여자의 몸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보니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약간은 공상적인 마인드로 읽어주면 되지 않을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일화가 있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데 그런 티가 전반적으로 보인다.
모텔의 한 방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쓰는 이야기를 그린 <이불 개는 남자>라는 작품 또한 특이했다. 일단은 이런 식으로 방 하나를 나눠쓴다는 이야기도 신선했다. 실제로도 잠만 잘 사람 구합니다라고 쓰인 광고문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렇게 낮에는 노는 방을 이용해서 또 손님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젼혀 하지 못했다. 실제로도이런 일이 있으려나. 사실 이런 설정이라면 약간은 로맨스 쪽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런 진부함을 떨쳐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여자가 메모를 남긴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에 대해 답은 없지만 그대로 행하는 남자도 참 괜찮아보였다. 이 이야기의 후속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페르마타>는 읽기가 힘들었다. 문장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그 배경이 되는 치과가 싫어서였다. 거기다 뭘 그리 자세하기도 설명을 해 놓으셨는지 당연히 치과의사가 하는 일을 묘사했을 뿐인데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내가 치과에 있는 느낌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능력이다.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그 배경이 되는 곳에 있게 만드는. 마지막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라는 작품은 어떻게 보면 가장 마지막이라서 많이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단편의 특징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앞서 말한 그런 특징들 말이다.
그림을 보고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조그마한 얌체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빠져 있을 때 쓴 글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림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나온다. 나는 내가 전에 읽었던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이라는 작품을 생각했다. 그 작품도 참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이야기는 이 책의 다른 이야기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느껴졌다. 마지막 결말까지도 그랬다. 만약 이 이야기가 제일 앞에 나왔다면 나는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인상이 지금과도 또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편집의 힘이다. 단편이지만 엄청난 몰입을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주는 책 한권이다. 엔드리스 시리즈 2권인 이 책은 끝이 없다는 그 단어의 뜻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듯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