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연구의 지평을 넓히다
이명재 2016/07/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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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의 옥중서신
- 임희국.이치만.최상도 편역.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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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0
- : 53
명성에 비해 미진한 손양원 연구
명성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경우가 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는 전자의 예가 되지 않나 싶다.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손양원 목사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훨씬 미진하다.
그의 출생 날짜에서부터 각종 학교 입학과 졸업 날짜 그리고 목회 관련 일시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음과 같은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에 대한 전기(傳記)가 먼저 나오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행 되었다는 것.
전기는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 칭찬 일변도)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실성(事實性)이 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손양원의 경우엔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전기가 나왔다. 안용준이 쓴 <사랑의 원자탄>은 그의 순교 1년 전인 1949년에 1부가 출간되었다. 1952년에 2부가, 그리고 1980년에 1부와 2부를 합해 한 권으로 출판했다.
이 책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국내뿐 아니라 수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읽혀졌으며 영화로도 제작 방영되어 신앙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그들의 연구에서 <사랑의 원자탄>에 의존한 바가 컸다.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전기물에 의존해 인물을 연구할 때의 한계는 많이 지적되어 왔다.
손양원을 소개한 몇 가지 도서들
이런 손양원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방면에서 여러 사람들이 노력해 왔다. 손양원 연구의 기본 자료는 그가 쓴 일기, 옥중 서신, 설교문 그리고 체형조서(경찰 진술, 검찰 신문 조서)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손 목사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런 자료의 실체적 접근으로 손양원 연구가 더욱 진전되기를 바란다.
손 목사의 친구 안용준에 의해 오래 전 출판된 <산돌 손양원목사 설교집(상․하)>(1962년)이후 여러 권의 관련 책자가 출판되었다. 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가 엮은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2002, 보이스사)를 비롯해 작년 10월에 출판된 이만열 엮음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201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이르기까지의 책들은 각 부분을 선별해서 소개하는 성격이었다.
이번에 (사)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이사장 이성희 목사)에서 간행한 <손양원의 옥중서신>은 손 목사의 글 중 편지를 전부 모아 소개했다. 손 목사가 주로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총 93편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2012년 자료 보관소인 손양원순교기념관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20편이 훼손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많은 노력 끝에 출판된 <손양원의 옥중서신>
그래서 현재 73편만 남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글자가 바래져 판독 불가의 우려가 있었다. 이번에 이것을 디지털 작업으로 사진을 찍어 싣고 현대어로 풀어서 붙인 것이 <손양원의 옥중서신>이다. 권두 해제를 포함해서 1부가 144쪽, 2부 260쪽으로 모두 404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1941년 9월부터 1945년 7월까지, 그러니까 손양원이 광주형무소에 있을 때 그리고 종신형과도 같은 장기 구금을 언도 받고 경성구금소와 청주보호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주고받은 서신들이다. 손양원이 아내 정양순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은 옥중서신이 아니지만 포함시켰다.
서신의 형태는 우편엽서와 봉함엽서 그리고 봉함편지이다. 형태에 따라서 내용의 다과(多寡)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짧은 내용은 우편엽서를 그리고 긴 내용은 봉함편지를 사용했다. 봉함엽서와 봉함편지는 검열에 걸려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편집 순서는 작성 일자, 소인 일자, 수신 날짜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 1부는 편지를 현대어로 고쳐 누구나 읽기 쉽도록 했고, 2부는 이것을 디지털 작업으로 사진을 찍어 실었다. 또 그 옆에 원문을 활자화해서 함께 실었다. 해제자는 1부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2부는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둘 다 일반인과 연구자들이 교차해서 읽으면 또 다른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이 편지에 송수신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손양원을 비롯해서 모두 19명이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교회 신자들과 주고받는 서신 속에서 손양원의 인간됨과 신앙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옥에 있으면서 부모님께 갖는 효성의 마음, 지아비의 역할을 못하는 데서 아내에게 갖게 되는 미안함, 자식들에겐 자상한 아버지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문장 하나하나에 그대로 서려 있다.
시대의 참 스승 손양원 목사
그것뿐 아니라 한 교회의 담임 목사로써 옥중에 갇혀 있는 자신으로 인해 성도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영적 손실을 마음 아파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다짐을 아울러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손 목사는 6.25 전쟁 때 주위의 간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피난을 가지 않고 애양원의 한센인 성도들과 함께 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승다운 스승이 드문 시대, 목자다운 목자가 귀한 시대에 손양원 목사가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서 갖게 되는 언행이 불일치, 믿음과 실천이 따로 작동하는 모습이 일반화된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목회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신행일치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손양원 목사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것도 신행일치의 결과이다. 독립운동가 손양원과 믿음의 보수자 손양원, 둘 가운데 후자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족 문제엔 타협의 여지가 있었지만 신앙 문제엔 결코 타협하지 않은 데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본 책에 실려 있는 손양원의 편지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 참 목자의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 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은 편지 자료를 모아 놓은 책이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원문을 현대어로 옮긴 것도 편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한 작업이어서 오역(誤譯)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편역에 참가한 임희국 이치만 최상도 교수는 손양원 연구 권위자들로서 이 방면에 무게 있는 성과물들을 생산해 온 사람들이다.
권두 해제를 중심으로 제기하는 몇 가지 지적 사항
어려운 작업을 잘 감당한 세 사람의 연구자들을 치하하면서 권두 해제를 중심으로 몇 가지 지적하는 것도 서평자의 몫이겠다. 이것은 책의 가치를 낮춘다기보다 내용을 보완하여 튼실하게 하며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자료집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평가의 여지가 넓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먼저, 손양원의 이름에 대한 것이다. 본명을 연준(燕俊)이라고 한 것은 현재 쓰고 있는 이름을 양원(良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준과 양원 두 개의 이름은 본명과 현재 명의 관계가 아니라 연준은 호적상의 이름이고 양원은 족보상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두 번째, 손양원의 생년월일을 과연 1902년 7월 7일로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손양원은 호적에 1902년 6월 3일 출생으로 되어 있다. 6월 3일은 음력이고 그 해 이날의 양력 날짜는 7월 7일이다. 지금까지 써 오던 6월 3일을 본인의 이력서 한 장(권두 해제 앞에 등재)에 의해 양력(7월 7일)으로 바뀐다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칠원공립보통학교 재학 기간을 1914년에서 1919년으로 적고 있다. 재학 기간이 6년인 셈인데, 손양원이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학제는 4년제였다. <칠원초등학교 100년사>에 1919년 졸업생 명단에 손양원(호적명 손연준으로 되어 있음)이 있다. 졸업으로부터 6년 전이 되는 입학 연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 칠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 해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그 학교의 정식 명칭은 '사립중동학교'였다. 이 학교 중등과에 입학해서 1년을 수학하다가 아버지 손종일의 옥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내려 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학교 명칭 등 고유명사에 대한 적확한 기록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책을 통해 얻은 의외의 소득
이 책의 서신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대 밖 수확이다. 장남 동인이 광주에서 '성경학원'을 다니다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 두었다는 것(29쪽 주1.), 또 동인이 부산 범일정 소재 통 만드는 공장(富士工場, 주인 박신출 집사)에 다니기 전 잠시 해운대 '백남주' 장로가 운영하던 '백일상점'에서 일 했다는 것(32쪽), 여기서 광주 성경학원 수학과 백일상점의 주인 장로의 이름이 백남주라는 것은 내게 새로운 정보가 된다.
또 손양원 목사의 처남이 동경대학을 다녔다는 것(64쪽)도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다. 당시 함안 대산면에서 동경대학에 유학 갈 정도면 실력도 실력이겠거니와 가세(家勢)도 탄탄하지 않았을까 싶다. 할아버지(손종일 장로)가 생명보험금을 얼마나 탈 수 있을지를 언급한 데서 가난 속에서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생명보험 가입)을 했다는 것(137쪽)을 알 수 있다.
감옥을 '영어(囹圄)'라고 한다. 법(令)을 어긴 개인(吾)을 가두어 둔다는 말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갇혀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손양원은 감옥에서도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체형조서 진술을 보면 감옥 안에서도 찬송과 말씀 묵상 그리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복심법원에 항소한 것도 형의 감량보다 법원 관계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손양원은 감옥 안에서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편지에는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참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다. 또 아버지에 대한 불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성도들을 돌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행간마다 배어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제 강점기 감옥에서 겪은 신앙인의 이중 고통
일제 강점기,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데엔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은 뻔하다. 사상범들에겐 더욱 그랬다. 가족 외엔 편지 내왕을 할 수 없어서 일가친척으로 위장하고 서신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었다. 손씨 가족으로 위장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손양선(본명 황양희)과 손수남(본명 김수남)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
손 목사도 가급적 교회 관련 내용을 빼고 일상적인 소식만 전하라고 부탁할 정도이니 검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된다. 손양원 목사의 편지 중 검열에 걸려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또 몇 줄씩 먹줄로 지운 뒤 전달된 것도 있다(315쪽).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서러움에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이중의 아픔을 겪은 옥중 생활이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을 읽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 않다. 손양원 목사가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大村良源), 그리고 편지 곳곳마다 교도관에 대한 고마움과 일본에 충성하는 말이 들어가 있다는 것 등은 읽는 내내 마음에 거슬렸다. 물론 검열을 의식한 형식적 문구이고 그것이 일제 강점기 감옥생활의 풍습이었다고 해도 '손양원'을 바라보는 시각에 호의적일 수 없다.
손양원을 독립투사보다는 굳건한 신앙의 보수자라고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6.25 때 끝내 순교를 당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하고 애쓴 분들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시간과 공력을 쏟아 부은 장면들이 페이지마다 읽혀진다.
손양원 전집 발간을 기대함
손양원 목사의 편지들을 번역 주석하려면 한글과 한자 그리고 일본어에 정통해야 할 것이다. 편역 및 해제를 맡은 분들이 이 일을 훌륭하게 해 냈다. 손양원 목사가 직접 남긴 기록들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편지에 이어 일기와 시, 산문 그리고 설교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잔존한다.
(사)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에서는 손양원 목사가 남긴 자료들을 디지털로 사진 현상하고 활자화해서 전집 형태로 계속 발간한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된다면 손양원 연구가 갈수록 속도감이 붙을 것이고 체계화 될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우리가 내 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서는 인물에 대한 왜곡과 폄하의 기술은 배척해야 한다. 또한 미화 일변도의 기록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가에게 최상의 덕목은 정직과 진실"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이 출판되기까지 수고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며 독자 제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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