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농담처럼 결혼하고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면 바로 얘기해야한다고, 폭력은 습관이라 사람을 고쳐쓰지 못하니 바로 이혼을 해야하는 것이라는 걸 친구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결혼을 앞둔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은연중에 폭력의 무한반복은 내 힘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도망쳐야한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줄곳 친구들에게 혹시 가정내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신고하고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여성쉼터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들었던 한밤중의 도망과 흔적없이 숨어살기가 폭력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결심이라는 것도 한몫을 했을터이지만.
이 소설은 요양원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 신영과 신영이 심리상담사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를 돌보는 요양보호사 성희, 그리고 신영의 쌍동이와 결혼한 주연, 주연의 딸이며 신영의 조카인 이수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그들이 겪어내야했던 폭력과 그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망각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가 왜 중요하죠? 중요한 건 지금 뭘 기억하고 있느냐예요. 우리가 산 세월 만큼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인생이 되거든."(53)
이 문장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의 인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이들의 이야기속에 담겨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의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다는 것. 잠시 멈추고 많은 생각을 해보게되는 문장들이 담겨있다.
피곤함에 책을 펼쳐들지 못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바로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이야기와 문장들이었다.
신영이 어릴 적 엄마가 당했던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냈지만 그녀의 쌍동이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니, 막연히 새언니와 조카가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 무엇인가의 느낌이 있었던 것을 모른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외면은 폭력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알게 된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도 모른척 동조를 했던 것임은 주연의 편지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와 거짓과 기억과 망각의 뒤섞임이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을 찾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기억과 과거의 조각들이 맞춰지고 이 이야기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을 견디어낸 이들의 선택과 결정, 삶에 대한 의지의 이야기라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