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시작은 봄이라고들 하지만, 나에게 첫 계절은 가을이었다."
소설의 첫문장을 읽으며 꼭 내 얘기같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흔치않다. 나에게 첫 계절이 가을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름을 버텨야 하는 계절이 되었고 많은 인내를 하며 가을을 기다리고, 수확의 계절에 태어난 나는 가을을 나의 상징인 것처럼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늘 첫번째가 가을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될거야"(128)라는 선언을 하는 솔미와는 다르지만 엄마를 돌보며 지나가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왠지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할 것 같아,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고, 엄마와 딸 솔미 두 사람의 삶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절친인 이모와의 단절을 읽으며 막장드라마를 떠올리고 있던 내게 이야기의 전개는 '엄마의 돌봄'이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엄마의 편집증적인 물건수집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오해와 상처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을 때 점점 악화되어가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딸 솔미의 '돌봄 선언'은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장들은 소설 속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엄마의 친구와 딸인 솔미의 친구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엄마와 솔미의 관계가 기나긴 시간을 들이고 상처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진짜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 역시 새로운 가족이 확장되어 가는 것처럼 풀어나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내가 예상했던 '엄마의 엄마'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오해와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에 대한 것은 아마도 많은 모녀관계에 넣어 이야기를 해도 다 이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는 그동안 엄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가족의 틀 안에서만 그녀를 바라봤으면서,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나는 나만 알았다. 말로는 엄마를 위해 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결국 그 속에 진짜 엄마는 없었다. 내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수수께끼인 줄 알았다. 나의 마음을 갈라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으니. 타인이 품고 있는 오래된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질 때 사람은 비로소 그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걸지도 몰랐다."(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