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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홀릭
  •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 39,600원 (10%2,200)
  • 2021-03-02
  • : 3,113

‘전쟁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 끔찍하다.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내가 그러한 끔찍함을 느낀 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처음 접한 대학생 때이다. 단순히 두 체제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남과 북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피상적인 사실만으로 한국전쟁을 이해하던 때였다. 그런 내게 한국전쟁에서 전투와는 무관하게 무수하게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거기에 더해 학살의 주체는 남과 북 어느 한쪽이 아니라 ― 당연히 학살이라면 북에서 저질렀을 것이라 생각했다 ― 두 체제 모두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와 인간은 그 무엇보다 잔인해질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한국전쟁에 대한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도대체 “왜 이런 사실들을 지금까지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었던가?” 하는 물음을 깊이 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 속에서 이름 없이 학살당한 수많은 민간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며, 설혹 학살된 민간인들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았더라도 냉전 시대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감추어야만 했기 때문임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살인적인 체제들이 가장 막대한 살육을 저지른 곳”인 《피에 젖은 땅》을 다룬 이 책을 읽는 내내 ‘한국전쟁’에 대한 내 기억과 계속 겹쳤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의 동유럽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을 어째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로 기억되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진실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니! 익히 그 잔인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니! 한국전쟁에서 겪었던 충격을 다시금 느낀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에 들려준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그 많은 대량학살의 이야기를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줄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하고 절멸했기 때문이었다. 혹여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더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못했기에 우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기 전까지.

 

1,400만 명이 죽었다. 그 숫자 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소련인 그밖에 다양한 동유럽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만이 아니라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소련도 이 대량학살의 주체였다. 헤아리기 어려운 1,400만 명의 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1,400만 명 각각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이라 말한다. 1,400만 명이란 추상적인 숫자로 치환되어 그치지 안 되고, 그 희생된 각각의 개인들을 떠올리며 ‘하나의 1,400만 배’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이 대량학살의 역사가 주는 경고를 받아들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었는가”(682쪽)에 초점을 둔 이 책은 역사의 기억을 복원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보통 역사 연구에서는 어떤 사건의 ‘왜’에 초점을 맞추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왜’에 집중하다 보면 어떤 해답을 찾으려 들게 되고, 그렇게 내려진 해답은 역사의 한쪽만을 보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대량학살이 저질러졌는지를 ‘6개 언어로 된 16개 기록보관소’를 샅샅이 뒤져가며 역사를 복원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다룬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몽유병자》는 그동안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이 ‘왜’ 일어났는지에 집중하여 전쟁의 책임을 덮어씌울 것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어떻게’ 전쟁이 이르게 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파고들며 제1차 세계대전이 가진 진실을 보여준다. “나치와 소련 체제의 기원, 그리고 그들이 왜 블러드랜드에서 만나게 되었는지의 기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있다.(27쪽)”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과 《몽유병자》는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은 ‘조국을 위하여’란 깃발 아래 발흥한 민족주의(또는 국가주의) 아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싸우고 죽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집단 또는 민족들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옮겨지거나 말살되었다. 제국이란 거대한 체제 안에 섞여 살던 다양한 집단 ― 민족으로 발명된 ― 들의 충돌이 1914년에 불거진 것이고, 이는 결국 ‘블러드랜드’라는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전쟁 속에서 죽어간 개인 하나하나를 기억해야 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후속작 《블랙 어스》에서도 지적하듯이 국가가 파괴된(또는 정상적이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씨앗은 항상 우리 곁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의 미얀마 사태는 그 씨앗의 불안을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불과 70년 사이에 ‘블러드랜드’나 미얀마와 유사한 일을 겪었던 것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피에 젖은 땅》과 같은 역사책을 읽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는 그 파멸의 씨앗을 뿌리째 뽑아내고 다시는 역사의 과오를 범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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