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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꼬리가 생기는 시간
  • 시간의 계곡
  •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 16,200원 (10%900)
  • 2025-01-17
  • : 15,280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표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자연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이 나왔던 적은 중학생 때 수련회로 간 성산일출봉 이후로 거의 10년 만이었다. 누군가는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가 결코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저 조용한 풍경 속에 생명의 보고와 위험이 숨겨져 있는 웅장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그 말대로 위험을 품은 아름다움이기에 그렇게 감탄하게 되는 것일까?

 이곳의 배경은 표지 속 그림처럼 섬마다 흐르는 시간이 다른 산골짜기의 어느 지역. 여느 산골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골짜기 마을들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는 큰 특징이 있다. 바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비슷한 섬들이 있는데 이러한 섬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나 구성만 조금 다를 뿐, 마을마다 하나씩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이 마을들은 모두 같은 마을이면서 다른 마을이다. 열여섯 살의 오딜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마을들은 20년, 40년, 60년 후가 지났을 때를 살아가고 반대로 서쪽에 있는 마을들은 같은 주기로 그 전을 살아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래와 과거가 공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상실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현재의 선택을 바꿔나가는 등 마을과 시민들의 존속에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기에 마을마다 경계에 철책을 세우고 헌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며,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문기관이라는-이곳에서 정부 기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곳에 청원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다른 마을에 방문해야 하는 정당한 근거를 토대로 신청하고 그 신청이 접수되어야만 가능하다,

 곧 졸업을 앞둔 열여섯 살을 살아가고 있는 오딜은 절친한 친구가 시내로 이사를 간 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조용한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 일상이라는 것이 비록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수다를 떨 때, 조용히 벽에 기대어 풍경을 바라보거나 점심으로 싸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시간을 때우는 등 다소 고독한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딜은 그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일상은 오딜이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앙리의 공이 그의 안전한 울타리를 깨부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리와 톰이 일부러 혼자 있는 오딜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녀가 움츠러들 만한 곳만 노려서 공을 맞히고 있었다. 오딜은 운동장 한쪽에서 선생님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신이 놀라는 광경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눈물을 참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오딜이 영원 같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마음속으로 수십 번 다짐하던 때에, 먼 곳에서부터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알랭과 에드메였다. 곧 알랭과 에드메, 조와 쥐스틴과 어울리게 된 오딜은 많은 일을 겪게 된다. 좋아하는 아이와의 추억이 단둘만의 기억으로 남길 바라기도 하고 부유한 아이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들의 생활을 잠시나마 엿보기도 하며 수영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재며 여느 소녀들과 같은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 사회적 평판과 보장된 미래, 행복에 대한 희망은 에드메가 죽으면서 깨어지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라는 노래가 있다. 영화 <장화, 홍련(2003)>의 막바지에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모든 일의 윤곽이 드러나고 수미가 과거를 회상할 때,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새엄마와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집을 뛰쳐나오고 마는 장면에서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비극성을 고조시킨다. 대부분 결말까지 보고 나면 사실 그동안 영화에서 보았던 수연과 은주는 수미의 다른 인격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시간의 계곡>을 끝까지 읽고 난 후, 나는 이 작품에서 에드메가 죽은 이후로 등장한 서른여섯, 쉰여섯의 오딜이 모두 그녀의 다른 인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주인공의 이름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연출되는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오딜은 주인공 오데트가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왕자가 잘못된 맹세를 하게끔 악마가 보낸 딸의 이름이며, 오데트(Odette)라는 이름 자체가 오딜(Odille)의 애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이후 흐름이 폭포의 흐름처럼 쉴새없이 급변한다는 점이다. 에드메가 죽은 후 오딜은 그동안 에드메의 행적을 보고하고 그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였던 자문관 심사 프로그램에 아예 출석하지 않아 최악의 형태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딸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투영했던 오잔 부인은 딸의 멍청한 선택에 크게 실망했을 뿐 아니라 그 후로 아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오딜이 직업을 구해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부모의 집에 들어가 살아야 했을 만큼 냉랭한 태도를 고수한다. 그 후로 오딜은 헌병이 된 이후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나 동료 병사로서 출세와 먼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기도 하고 나름대로 일에 적응해 이 직업을 택한게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낄만큼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한 청원인이 손녀를 보고 올 수 있게 데려다주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형편없는 모습으로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오딜은 충격에 자신의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레몽의 제안대로 장사빌을 찾아가 장교로 임관하겠다고 지원한다. 가정폭력을 당하다 다른 섬으로 가서 과거의 자신을 말리기 위해 탈출하려는 옛 동기(자문관 심사 프로그램 탈락자)를 제압하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녀를 놓치지만 레몽의 도움과 그의 거짓 보고로 이를 기회삼아 장교 임관 후보자 중 선두에 서게 될 정도로 출세에 가까워지는 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한 직업을 갖추지 못하고 떠돌이 사냥꾼이자 일용직 일꾼으로 전락한 알랭을 만나 그에 의해 더러운 평판을 얻고 좌천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순식간이다. 단순히 이렇게 빠른 변화만으로 오딜이 그녀의 환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집중한 부분은 에드메의 죽음 전과 후로 변화되는 작품의 흐름, 묘사 방식, 주인공의 심리 등 그 모든 것이다. 1부에서는 소녀였던 오딜의 섬세한 감정과 복잡한 고뇌, 혼란스러움이 자세히 묘사되었다면 2부는 마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스릴러와 서스펜스)을 읽는 것처럼 수많은 사건과 속셈이 오딜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부정한 방식으로 수습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모습보다는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그에게 선택을 종용하듯 드밀어지고 잠깐의 고려 끝에 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반복된다. 물론 현실에서도 어른이 되며 녹록치 않은 사회에 적응하느라 염세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하긴 하긴 하지만 2부에서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인형극에 사용되는 꼭두각시처럼 보일 정도로, 기묘하리만큼 자아를 잃는다. 마치 인물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인물을 이끌어간다 해도 좋을 정도로 오딜은 착실히 비극을 향해 끌려간다. 자신의 심리보다도 타인과 선택이 미칠 영향을 무감하게 바라보고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생각하는 시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처럼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선택이 반복되는데,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마다 그 선택 이전까지 그가 열심히 고려해왔고 우선시했던 가치는 그 선택이 얼마나 오판이었는지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쉽게 버려진다. 지나치리만큼 주인공에게 거리감을 두고 흘러가는 작품의 서사와 기술,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는 독자는 오딜에게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가까이에서 바라봐왔던 오딜로부터 급속도로 멀어지며 의아함을 느낀다. 마침내 작품 말미에는 이 세계관 전체에서 벗어나 이 골짜기와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나누는 기준 중에 ‘역할’이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주동 인물(주인공)’, 작중에서 주인공과 갈등을 빚거나 그 흐름을 방해하는 인물을 ‘반동 인물’이라고 일컬으며 그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결정, 그리고 작품이 진행될수록 어떤 결말에 처하는지 등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그런데 1부와 2부의 흐름, 그리고 2부에서의 오딜과 그녀가 결말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다른 자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완전히 객관적인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는 입장이며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관찰하는 자신이라면 2부에서의 행동이나 정신없이 교차되는 독백,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이나 인물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과거나 미래에 더 중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오딜의 독백과 행위가 이해되는 셈이다. 애시당초 작품은 에드메와 오딜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의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데에 비중을 그리 두지 않았고 오로지 오히려 오딜의 관점에서만 진행되어 독자들은 오딜이 자신을 바라본 시점에서밖에 그녀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2부에서의 오딜이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나? 반대로 그 미래들이 모두 실존했다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에드메를 살려내고도 행동할 수 있었던, 열여섯의 자신과 마주치고 총에 맞는 죽음을 맞이한 찰나의 오딜은 누구인가? 열여섯의 오딜은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자신이 한 선택과 결과를 감당하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그 결과로 태어난 다른 자아는 [자동] 버튼을 설정해 놓은 로봇처럼 서른여섯, 쉰여섯이라는 분기점을 맞아 다른 자아를 갖출 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과 결과들을 연결 짓지 못하고 분리하여 관성적으로 살아왔다. 작중 자주 강조되는 ‘개입은 곧 절멸이다’라는 법칙이자 구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선택한 결과 태어나는 우리가 우리의 다른 자아라면 그 선택을 번복하고 바로잡게 될 때 사라지는 것 또한 그 쉬운 선택에서 태어난 쉬운 우리일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잘못된 선택에 대한 일종의 우화라고 느꼈다. 작중 내내 오딜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에게도 같다. 우리는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과 이곳 모두 공통점은 있다. 우리가 내뱉은 말과 하기로 결심한 선택을 되돌리기는 몹시 어렵다는 점이다. 이처럼 잘못된 선택은 그 순간부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잡고 흔든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선택은 곧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몰아치는 선택과 경험을 하는 나는 오직 하나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수백, 수천 가지 과거와 미래, 그때 닥친 문제들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한 가지의 현재가 하잘것없어 보일지 모른다. 당장 이 순간에는 그 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잘못과 절망이 에드메를 살리는 결말로 이끌었듯, 우리에게 닥친 물결이 바다로 나아가는 데 등을 밀어줄지도 모른다면, 그렇게 믿는 낭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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