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에서는 대중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표차로 트럼프가 재선되었다. 워낙 극단적인 정책을 내세우기도 했고 혐오에서 오는 결집력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만큼 사람들은 그가 재선되기까지 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는데, 의외를 넘어서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결과가 나오자 다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먼 곳을 보지 않아도 당장 우리나라의 상황 또한 계엄령이 해제되고 법원이 점거당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이에 항거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상황이기에 결코 안정된 시국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폭로와 발견의 연쇄 쇼크에서 흥미로운 점을 한 가지 살펴보면, 그들의 집권 과정에 공정하지 못한 공작이 이루어졌음은 명확하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까지 완전히 0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보수 진영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알려진 ‘태극기 부대’나 60대 이상 유권자들의 여론 조사를 살펴본다면 오히려 연령대별 유권자 비율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투표율까지 높은 노년층이 보수정당에 확연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교과서에서,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도덕규범과 법이 자정 기능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우리를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할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인터넷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성악설’에 대한 주장이다. 어느 개인이 겪은 불이익에 대한 사연에서부터 희대의 악인으로 비치는 인물을 다룬 방송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함을 역설할 만한 근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그러한 악에 대하여 손가락질하고 선을 준수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보이면서 그 도덕심이 누가 보아도 약자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근거 없고 원색적인 비난으로 유명하다는 ‘네이버 뉴스’가 꼭 아니더라도 장애인·여성·외국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는 유튜브 영상의 댓글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당연하지 않은 혐오 발언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우리가 배웠던 정의와 선이 현실 사회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항상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법을 준수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규칙들은 사실 빛 좋은 개살구였나? 왜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그 당연한 규칙들을 우습게 여기며-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려 할수록 내게는 ‘선비충’, ‘진지충’ 같은 호칭이 덕지덕지 붙여졌고 나는 차츰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배우며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으로부터 재미없고 당연한 소리만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가 안타깝지만 마음은 더 상쾌했다. 그리고 그렇게 입을 다물고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조차 사회생활과 위계질서라는 이름 아래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을 돌아볼 때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너무 예민한 걸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내가 바랐던 정의로운 어른, 다음 세대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선배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에서는 “교과서처럼 말한다”라는 비웃음 섞인 괴짜 취급에 어느새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동물농장> 속 벤저민처럼 변해있었다. 그런 생각이 절정에 달할 때가 작년 겨울이었다. 잠시 집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2주간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던 나는 그곳에서 기대치 않게 책을 추천받았다. 정중하되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실린 눈빛을 보자 평소 잘 읽지 않던 책인데도 자연스럽게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니까, 뒷일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좋아하고 옳다고 믿는 것을 자유롭게 권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 만남은 그 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책 편식을 고쳐준 것도 이러한 낭만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 든 것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지금은 거울이 그려진 표지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상처 입은 흑조를 여러 마리의 백조가 외면하는 샛노란 표지였는데 그만큼 일상에서 약자로서 차별받았을 때의 기분을 잘 표현한 그림이 없어 나는 지금도 그 표지를 제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표지 또한 책의 일부이자 활자 속에서 만나게 될 주제를 가리키는 표지(標識)라 생각하기에 책을 고를 때 표지를 다소 중요시하는 편인데, 이 책의 표지는 책을 읽기 전에 보아도 내용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고 책을 읽고 나서 볼 때에는 그동안 열거되었던 사례들 속 약자가 처한 환경을 다시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해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눈에 아른거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차별을 얘기하면 역차별을 먼저 꺼내는 사람, 평등과 형평 그리고 공정을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 차별을 웃음 소재로 사용하여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는 “웃었으니까 동의한 거 아냐?”라고 당당하게 되묻는 사람은 물론이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장애인을 위해 다른 채용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불편한 권민우 변호사 같은 사람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사우나에서 출입을 거부당했을 때 그것이 주인의 재량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우리가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친절하게 권하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내가 충분히 사회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을 품는다. ‘왜 우리 사회는 외모나 연애, 결혼 같은 지극히 사적인 화제는 무례하다 싶을 만큼 쉽게 꺼내면서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 대한 고찰은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가령 인터넷에서는 ‘퐁퐁남’이라던가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간호사, 스튜어디스, 유학파, 예체능, 기독교, 엔피, 교사, 플로리스트, 필라테스, 헤어 드레서, 네일아티스트, 카페 사장)’이라는 근거 불분명한 비하 용어가 쉽게 오가면서 현실에서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성차별이 만연한 한국 현실에 대해 아예 모른척하고 있어야 하는 현실 말이다. 비단 성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가까운 일본에라도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놀랐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처우는 굳이 멀리 찾아보지 않고 점자 블록의 관리 상태,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어떻게 대우하고 시민들은 이러한 대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라도 인식하는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차별에 차별을 거듭해 시민들의 눈에 보이는 곳으로까지 오게 된, 존재의 마지막 선에까지 서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거론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존재하는 명찰 색 차이의 문제나 예멘 난민의 입국(2018)을 앞두고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욱 강하게 반대하는 것, 우열반 제도와 같은 차별은 애당초 현재까지도 차별이라는 인식조차 희박하다. 그렇지만 이런 깨달음이 반가웠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로소 차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특권은 가진 자의 여유이기에 내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p.28) 나는 그러한 특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자 약자로서,-모순되게 들리겠지만-입체적인 인간으로서 어딘가에서 차별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 또한 차별의 주체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당장 내가 완벽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만들지는 않아도, 지금 우리가 상호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구성된 사회의 약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이것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계속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며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맸던 목소리였다. 나는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겪은 것, 우리가 일삼고 있는 것이 차별이라고 말해줄 단단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만난 같은 성향의 사람, 그와 취미에 대해 나눈 대화보다도 우리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이 보이지 않는 신념이자 목소리를.
차별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논쟁이 뒤따라온다.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항상 반가운 사람은 없고 그 변화가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었던 권리를 조각내어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처럼 보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나를 흔들었던 것은 나를 호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주변인들조차 내가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마치 논쟁의 화두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단순히 낭만과 이상에 사로잡힌 치기 어린 젊은이로 보는 순간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인터넷에서 인상깊게 읽었던 댓글이 있다. 차별에 대해 살펴본 어느 기사에 달린 한마디는 “네가 받는 불이익만 보지 말고 현실을 살아라!”였다. 몇 년 전에 본 거라 그 댓글이 기사 자체를 비판한 것인지, 기사를 옹호하는 댓글과 대립하며 나온 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차별을 분석하고 더 나은 방안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볼 때면 그와 비슷한 말은 댓글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는 건 공상에 불과한 낭만일까? 어쩌면 낭만이자 그저 이상(理想)으로 치부되는 그 선(善)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인간이라는 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선을 넘어버리는 때가 온다면,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제재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우리 대다수가 누렸던 이 평범한 삶이 특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인의 시 <달나라의 장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이 시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황규관 시인의 해석을 좋아한다. 팽이는 험난한 현실에 처해있는 내게 환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한지 반대로 보여주며 설움을 터뜨려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만큼 팽이가 도는 걸 지켜보는 건 편하다. 달나라의 장난같이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내 현실과 정신과는 다른 이야기다. 만약 내가 팽이가 도는 것처럼 편한 길을 원한다면 너도, 나도 각자 알아서 돌면 그만이다. 평등이나 공정, 정의는 ‘공통된 그 무엇’이고 쉽게 보장받지 못한다.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닿을 만큼 반복되어야 비로소 인식될 것이다. 그런 현실은 꼭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우는 것이 비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나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팽이는 계속해서 돈다. 이 시에서 그랬듯 그 서러운 현실을 보는 것보다 팽이를 보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팽이를 바라보면 별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별세계인가, 그저 팽이가 돌아가는 현실인가. 그리고 서러움이 존재하는 그곳이 그저 이상이자 낭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차별과 평등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문제제기를 할 만큼 순발력이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