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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teforme
  • 쓰는 사람, 이은정
  • 이은정
  • 14,400원 (10%800)
  • 2021-07-14
  • : 393

‘작가, 이은정’이 아닌 ‘쓰는 사람, 이은정’. 아직 소설로 만나지 않은 소설가의 산문집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쓰는 사람’이라는 자기소개에 홀려 읽게 되었다. 작가라는 말은 예술가를 떠올리게 한다. 생각과 마음을 보이는 형태, 글이나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들로 만들어내는. 그런데 그를 더 구체적으로 쓰는 사람이라고 부르면 쓰는 일과 쓰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이 노동으로 다가온다. 한 권의 책이 어떤 영감이나 글쓰기 요정이 뚝딱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재능이란 가느다란 거미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반짝이는 고통과 묵묵함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과연 그런 것이어서 쓰는 사람은 충분한 평온과 무신경한 기쁨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가 적어둔 것은 주름지고 초라한 것들의 따뜻함, 더 털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서 마지막을 놓아버릴 때 느끼는 충족, 우연한 불운이 주는 농담 같은 얘기들이다. 요새는 잘 나오지 않지만 오래전에는 이런 느낌의 글을 수필이 아닌 ‘수기’로 엮인 책에서 종종 읽은 기억이 있다. 사실 수기와 수필은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수필은 아무 날도 아닌 날을 마음만 가지고 쓸 수 있다면 수기는 어떤 체험을 한 사람만의 언어로 적어낸다는 미묘한 차이 정도가 있을 뿐. 그런데 여기에 이 책이 수기의 느낌을 주는 이유가 있다. 작가는 쓰는 사람으로서 아무 날도 아닌 날을, 작고 가만한 날을 살아내는 체험을 적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독자가 작가의 마음을 엿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살아내는 모습을 아주 가깝게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읽다 덮어둔 책 표지에 쓰인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란 표현을 보고 어린 가족이 기겁한다. 목매달아 죽어도 좋다고? 하면서. 아가, 넌 아직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좋은 게 어떤 마음인지 당연히 모르겠지. 나는 ‘죽어도 좋을’보다 나무가 더 크게 보였다. 부디 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그에게 그늘도 되어주고 초록도 나눠주고 꽃도 열매도 아름답길.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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