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비온뒤 맑음
이 책은 내 손에 2년 터울을 두고 두 번 집혔었다. 멋모르고 학교 도서관을 기웃대며 서가번호대신 감으로 책의 자리를 익히고 있던 새내기 때와 3학년 눈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던 때. 1학년 때 난 바따이유에 매혹됐었고, 라이히에 미쳐있던, 간간히 프롬을 읽으며 낭만에 빠지기도 했던 새내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때의 난 성의 정치학과 권력에 대해, 오롯이 아름다운 性에 대해, 권력도 소유도 불가침의 권역인 성에 대해 깊이 빠져있었다. 내게 남녀의 사랑은 한낫 한줄기 웃음에 지나지 않을 때, 날 따라다니던 남자애의 끈질김에 지쳐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학교 도서관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으며 책 제목과는 사뭇 다른 책의 내용에 잠시잠깐 놀랐던 게 첫 대면이었다고 할까.

그 뒤엔 대학교 3학년 수업 중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이었고, 맨 앞자리에서 성심성의껏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밖은 미친듯이 쏟아붓던 눈에 의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였고,  이내 작은 강의실은 술렁술렁, 선생님은 쉬는시간을 앞당기셨고, 정말이지 놀랍게도 딱 10분동안만 양동이로 퍼부어대듯 내리고 딱 그쳤었다. 그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촬영하러 나갔던 애인의 안부를 걱정했었던 기억. 대부분의 학생들이 눈을 맞으러 뛰쳐나갔었는데 낭만파는 아닌 모양인지라, 그 때도 덮어뒀던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이 책이 그 책이다. 덩그러니 두어명 남은 교실에서 선생님은 내가 읽는 책을 넌지시 보시더니, 자기 때에는 '프롬'을 읽었었다고 웃음지으셨다. 그 때 '프롬'에 대해 이야길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머리에 소복히 쌓인 눈을 털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기억난다.

이 책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 게른샤임, 바로 벡 부부가 함께 써낸 공동의 작업이었다. 내용 또한 남녀 사이의 사랑에 대한 고찰이라기보다는 가족사회학에 더 가까운-가족사회학의 참고도서중에 끼어있기도 하던-책이다. 남과 여의 성별 투쟁과 사랑이 없기에 더욱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한다는 섬뜩한 뒷면을 해부해낸 아주 혼란스러운 책. 개인의 자유로움, 개인화의 가속화, 그 완전한 외로움 중에 목매다는 사랑. 그러나 여전히 깨부숴지고 있는 현실적인 사랑.

때로는 싸늘한 냉소조차도 쓰라린 사랑의 최신 변종일 경우가 많다. 여기서 사랑은 결코 충족과 같은 것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충족은 사랑의 오직 한 측면, 사랑의 맹렬한 한 측면, 즉 육체의 스릴을 가리킬 뿐이다. 일단 목적이 '성취'되고 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매혹적으로 보이던 육체는 아무렇게나 옷이 버려진, 어떠한 매력도 없는 낯선 살덩어리로 보이게 되지 않던가.
충족이란 얼마나 쉽게 차가운 시선으로 변해버리는지! 바로 조금전까지도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너와 나를 하나로 만들며, 두개의 걸어다니는 타부들이 압도적인 절박함으로 뒤엉켰던 그 곳에서, 우리는 지금 비판적인 눈으로, 흡사 육류 검사관처럼, 소와 돼지를 그저 소시지로만 바라볼 뿐인 푸주한의 눈길로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는 것이다.

주위에서 많이 들려오는 이혼 소식. 아이가 없는 가정의 맞벌이 부부들은 낭만적 사랑이 식어가면 쉽게 깨어진다. 전통적 고정판이 사라진 상태에서 너와 나 사이에 흐르던 감정에 냉기가 섞이기 시작하면, 개인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때문에 사랑은 아주 약하고 위태로운 것이 되고, 동시에 그만큼 열렬히 매혹적인 어떤 것이 된다. 개인화가 만연된 이 땅에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은 나를 사랑해 줄 단 한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 서로가 대등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면서 너와 나는 쉽게 만나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고 쉽게 사그라들어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혼남, 이혼녀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그렇다면 혼자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에 벡 부부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결혼 역시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은 사라지고 있어도 가족은 사라지고 있는지, 혹은 가족은 고정적인 것인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은 종종 죽었다고 선언되고 매장되어 버린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문화적 평가와 이데올로기적 분석 후에도 아직 개인은 살아남아 우리의 마음과 글쓰기를 홀리고 있다. ─ 오직 '주체적 요소'로서만. 아도르노.

종종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이 사회도 끊임없이 가족주의를 양산해내고 있다. 가족주의란 국가를 지탱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사회적 책임 또한 가족의 책임으로 몰아가며 어느 정도의 면책을 꾀하는 것도 '가족'안에는 사랑과 따뜻한 정서, 이를테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류의 신파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끈끈한 관계임을 강요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끊어진지 오래인 '홀로된 인간'이 억지로 가족이란 틀 안에서 연출된 감정으로 연기하며 점점 더 외로워지는 형국이다.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여성들을 위한다며 '가족여성부'라는 어처구니 없는 행정부처로 탄생시키는 악날함을 국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혼자가 된 개인들을 모두 떠안을 능력이 없고, 개인화가 진행될 수록 국가의 토대는 점점 약해지는 이유에서일게다.

여자들은 감정이 식으면 등을 돌릴 수 있는 남성을 떠나,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아이를 원한다. 내 주위에도 결혼생각은 없어도, 아이생각은 있는 몇몇의 여자들이 있다. 그녀들은 끊임없는 언쟁과 권력다툼에 지쳐 감정을 공유하고, 탯줄로 이어진, 자연스런 신체접촉으로 인한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는 아이를 원하게 된다. 물론 이 또한 홀로 설 수 있는 여자들에 한해서다.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도 아이는 한편으로 장애물과 방해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뭇 사람들은 어떤 시선을 보내는가? 그 한결같은 마음이 바로 한편 섬뜩한 가족주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는 외로운 인간들이 오롯이 사랑을 주고, 몸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마지막 대안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남과 여의 사랑만으로 이야기되는 시대는 끝나버렸다. 이성의 자리에 아이가 자리하고, 그 자리를 대신 강아지과 고양이 등 갖가지 동물들로 대체된다. '나'의 주체성의 너무도 견고해진 이 시대에 '너와 나'가 '우리'로 엮일 수 있는 시간은 찰나인 셈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의 마음과 영혼이 될 수 있다고 믿던 시대는 흘러갔다. 하나의 마음과 영혼은 둘 중 하나의 숨죽인 비명 아래에서만이 가능했으므로.
외로운 너와 나, 영속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그 꿈은 개인의 아래에서 수없이 헤어지고 있다.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서로를 가슴으로 밀어넣지만, 곧 개인이란 이름으로 헤어지게 되는 법.
결혼이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우게 되는 딜레마의 장이다. 그 투쟁의 장소에서 이 시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우린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서로에게 부치는 사랑의 연가를, 이 조각난 유토피아에서.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