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접점
anyone 2004/01/2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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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아니,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만 한다면 이소설의 코털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그만큼 단순하지만 또한 단순하지 않다.
소설 분량의 반을 차지하는 1부에서 사건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하루, 아주 무덥고 둔한 공기가 온 사방을 가득 채운 날, 오랜만에 집을 방문하는 오빠를 위해 연극 대본을 쓴 소녀 브리오니는 전 인생을 좌우할 오해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그 날 하루에 모든 것이 잉태되었다. 죄를 저지른 자의 '길' 날의 여운이, 불행하게 막 내릴 갑작스런 사랑의 신열이, 너그러웠던 인간의 돌변이, 그리고 한 인간의 기나긴 속죄의 시간이.
그래서 그 소설가(이 또한 특별하달 것은 없지만 재밌는 장치의 하나)는 그렇게 말이 많다. 몸짓 하나에 바쳐진, 말 없음 하나의 이유가 변명처럼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의 인생을 속박한 날의 몸짓, 사건 하나하나를 어떻게 허투루 놓쳐버릴 수 있겠는가.
영화처럼 그 장면들은 떠오른다. 그 순간의 풍경, 바람,구름, 햇빛의 조도, 햇빛이 드린 그림자, 햇빛의 느낌, 나무, 꽃, 새 울음소리, 풀 등을 비롯해, 트리톤 분수, 건물의 내력, 꽃병, 연못의 내력, 터너 가 집의 묘사 등 , ... 수영장으로 뛰어들기, 쐐기풀 치기, 엄마의 편두통, 남편의 야근 등 상황의 묘사까지 어느 여름날의 하루는 그렇게 길다. 머릿속에서 너무나 많이 떠올려 보았기 때문에 잊혀지기는 커녕 더욱더 분명해지고 점점 더 시간이 길어지기만 하는 지나간 과거의 하루.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서 수군수군 말하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소리처럼 불안스럽고 조심스럽다.
2부와 3부의 책략은 좀더 다르다. 좀더 집중적 조명으로 다가간 다. 2부의 전쟁은 자꾸자꾸 침이 마를 정도로 위급하다. 3부는 속죄의 시간을 지내는 작가의 모습이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곳에서는 허구가 끼어든다.
장중하고 그 단단한 맛은 고전소설의 거장에게서나 맡았던 것이며, 완벽한 반전은 지극히 현대적인 작가들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여운에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다음 대화를 발견하고 그랬지 하며 쓸쓸해졌다.
'이제 길은 구름의 오른쪽, 됭케르크의 동쪽 지역과 벨기에 국경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브레이 듄스' 지도에서 읽은 지명이 떠올라 로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 괜찮은 이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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