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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바로 다음날, 나는 내 뱃속에서 거의 다섯달 가까이나 머물고 있던 아이를 없애버렸다. 넉달이 넘어 위험할 줄 알았더니, 이전의 몇번처럼 간단하고 수월한 수술이었다. 병원 아래층의 식당에서 나는 설렁탕을 사먹었다. 국물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을 작정으로 그릇 밑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살아야지, 악착같이 꼬리곰탕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을 해야만 했으나 살아야지, 따위의 생각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보다도 더 나빴다. 그러나 그것말고는 더이상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 그 여자의 자서전.-31쪽
편지에 관한 그의 말이 거짓말인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공원에서 기우뚱한 자세로 착지를 한 그가 나를 향해 웃어보였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은 훼손되지 않은 채, 혹은 못한 채 아예 '종신'이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혹은 훼손조차 기억이 된다는 걸...... 그리하여 기억은 때묻고 더럽혀진 채로 쌓여가는 것이다. 모든 추한 꼴을 다 견디고 나서야 마침내 다가오는 생의 끝. 해피엔딩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와 나는 아직 그 끝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63쪽
눈물을 거두어버린 한쪽눈은 이제 한사람의 죽음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남아 있는 눈은, 눈물을 거두어버린 눈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흉하고 끔찍한 것들을 평생 목격하게 되리라. 한쪽 눈의 마지막 기억을 비웃으면서, 더 많은 것, 더 지독한 것들을 담아내리라.-86쪽
규상이 어쩌다 간혹이기는 했지만 엑스터시를 복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화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 이제보니 불량청소년이었군요, 말했었다. 그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내 나이는 말이지, 재기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타락하기도 어려운 나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양쪽 다 불가능하지.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말을 해놓고 난 뒤에는 그 말이 마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고백하건대, 그 어느 쪽도 포기가 안되었던 것이다. 불가능을 인정한다는 것과 포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문제였다. -127쪽
엄마, 제발 그러시지 말라고, 나와 앉아 계시고 싶으면 불이라도 켜시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얘, 늙으면 귀가 밝아지는 모양이다. 낮에는 멀쩡한 소리도 못 들으면서 밤이 되면 모든 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구나. 캄캄한 어둠속에, 뭔지도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수선수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때는 시끄러워 참을 수가 없다가도, 어떤 때는 내용도 모르면서 그게 그렇게 재미진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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