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핵 폭발이 앞으로 지구상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일까? 핵보유국가들은 핵을 통해 자신들의 국가가 안녕하고 건재함을 과시하려 하지만 과연 핵이 안전을 담보해줄지는 의문이다. 과거 냉전시대에 분단된 독일에서 일어난 핵폭발을 가정하여 쓴 이 소설은 표지의 검붉은 색채만큼이나 무섭게 다가온다. '동화 보물창고'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동화라고 보기엔 너무 무거운 소재이다.
모든 게 푸르르던 칠월, 고속도로를 달려 외갓집이 있는 쉐벤보른으로 휴가를 떠나는 롤란트네 다섯 식구가 목격한 것은 번쩍이는 섬광과 버섯구름이었다. 그 뒤 이들 가족이 쉐벤보른에서 목격한 삶은 지옥에 다름 아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 원자병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웅큼씩 빠져나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 티푸스와 이질같은 전염병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서로 때려죽이고,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다. 몸도 마음도 모두 황폐해진 핵 폭발 뒤의 살벌한 풍경들이다. 방사능에 오염되는 것이 토양과 환경만은 아니다. 가장 큰 오염은 사람의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것이다.
부모도 없이 내버려진 아이들은 '천벌 받을 부모들'이란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놓고, 모두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간다. 아이들은 구걸을 해서라도 동생들을 먼저 먹이려 하지만 어른들은 구걸하는 아이들을 때려 죽이고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핵 폭발이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듯 어른들은 책임을 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서로 도와가며 살 만한 여력이 없다.
롤란트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누나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원자병으로 죽고, 동생도 티푸스의 고열에 시달리다 죽는다. 게다가 엄마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잉태하고 있다. 희망을 잃은 엄마는 자신이 살던 프랑크푸르트의 보나메스로 돌아가면 지금의 삶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거기엔 건물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쉐벤보른으로 돌아와 만삭의 엄마는 아기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아이에겐 눈동자도 없고 팔도 짧을 뿐이다.
개들도, 고양이도, 새들도 없어지고, 천적이 사라진 자리엔 대담해진 쥐와 병충해들만 들끓는다. 그래도 사백 명 남짓 살아남은 쉐벤보른 사람들은 핵 폭발 뒤 서너 해를 넘기면서 안정을 찾아간다. 사람들은 들판에 감자를 심고, 자급 자족하며 롤란트는 아빠와 함께 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열두 살에 핵 폭발을 경험한 롤란트는 이 소설 속에서 가장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지닌 아이다. 열일곱 살이 되어 그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도둑질하거나 죽이려 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고 도움을 주며 어려움을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두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전하는 냉철한 롤란트의 이 메시지는 정작 어른들이 깨달아야 할 구절이 아닌가 싶다. 어른들이 '천벌 받을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일에 끊임없이 대화하고 책임져야 하는 그런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모든 재난은 나 이외의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