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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걸음
  • 그리운 날이면 그림을 그렸다
  • 나태주
  • 13,500원 (10%750)
  • 2022-10-06
  • : 204
80년대 초 대학 문학동아리 시절,
자취방에서 밤새워 시를 쓰고,
이맘 때가 되면 캠퍼스에서 시화전을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운 날이면 그림을 그렸다>는
'풀꽃 시인'으로 알려진 나태주 시인의 시와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한 임동식 화가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시화집이다.

해방둥이, 1945년 동갑내기인 두 분의 시화집을 받아들고
책 냄새를 맡아본다.
혹여 향기가 나지 않을까?
하지만 빨리 읽을 수는 없다.
시를 빨리 읽어내는 것은 시인에게 미안한 일이다.
글자 한 자, 문장 한 장은 물론,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야만 시를 감상하는 맛이 난다.

나무와 자연, 자연과 인간.
자연을 통해 인생을 묵묵히 관조하는 듯한
섬세하고 디테일한 임동식 화가의 그림에서
우리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그림에 맞춰 나태주 시인이 함께 동행한다.
시는 언어의 정수.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정제된 언어 속에서
시인의 통찰력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시인의 연륜을 통해 빛나는 시편들이 참 많다.

'배반은 없다'

인간은
뒷모습일 때만
진실하지만

자연은
앞모습일 때도
여전히 진실하다. (63쪽)

'청춘'

오래 사시어
늙으신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무

봄이면 여전히
새싹을 내밀고
여름이면 또
햇빛을 부르고
바람과 비를 만나
노래하니 여전히 청춘

가을 되어
낙엽 져도 좋고
겨울에 흰눈에
덮여도 좋으리. (71쪽)

가수가 낸 앨범에서 히트곡 1~2곡 내면 성공이듯
시집에서도 빛나는 시 2~3편이면 족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아껴가며 읽어야 할 시가 참 많았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 저 너무 늦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꼬박꼬박 월급봉투 모아
논이라도 몇 마지기 사달라 그러셨지만
실은 저 혼자 쓰며 세상 살기에도
주머니 속은 턱없이 허전했고
제가 떠돌아다닐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거칠었습니다
(.....하략) (81쪽)

마치 성경 속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는 듯 하다.
이 시에서는
팍팍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 자리에 옛 모습 / 그대로 계셔주시"는
고향같은 아버지 품이 있어 위안을 삼게 된다.

'저녁 강'

새들도
이미 없네

하루의 노역을 벗고
지는 해 붉은 목숨

혼곤하여라
감기는 눈꺼풀.
(83쪽)

석양이 물드는 저녁 강가에서 고된 삶과 안식을 생각케 하는 이 시도 참 아름답다.

"바람을 안고 올랐다가 / 해를 안고 내려오는 길" (115쪽 '하오의 한 시간' 중에서)처럼
풍운의 꿈을 품던 시절과
뒤돌아서는 시절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림 '비단장사 왕서방' 시리즈에서는
옛날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손님조차 구경할 수 없는 포목점의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
"오라는 손님은 오지 않고 / 창밖에 빗줄기만 내리고 있어' (119쪽 '응시' 중에서)
쓸쓸함만 가득한, 우리네 인생 같은
허무함이 짙게 배어나온다.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임동식 화가의 그림을 통해
나뭇잎 하나, 빗줄기 한 줄기 마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태주 시인은 그림으로 일생을 고집하고 수절하게 된
"임동식이란 화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원형을 그림으로 드러내면서 일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이 말에 맞춰보면 나태주 시인 역시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원형을 시로 써내려간 일생을 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보내는 찬가가 아닐까 싶다.

대학시절 동인회에서 불려지던 노래가 있다.
"지금도 나에겐 아름다운 꿈이 있으니
시인의 창가에 피는 꽃이 되고 싶어라"

그림을 (눈으로 보고, 시를) 읽는다.
시를 읽지 않는 각박한 시대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리운 날이면 그림을 그렸다>를 통해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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