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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첫 태양
  • 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6,200원 (10%900)
  • 2026-01-30
  •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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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siopeia_book

 

#카시오페아출판사 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스토아철학을 통해 시대를 견뎌내는 법, 혼란과 동요를 잠재우는 법을 깨닫고 고요히 나의 길을 걷도록 위안과 힘을 얻고 싶었다.

 

+ 본서에 대하여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약력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이 사람은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 정치의 현현이기도 하다.

황제이면서 스토아철학 철학자로서의 정체성도 가진 인물이다.

황제의 아들이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입양되었다.

그를 입양한 그의 삼촌이 황제가 되며 계승자가 되었다.

삼촌인데 입양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시켰다.

입양됐다지만 출생 자체가 남다른 우월한 계층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원래부터 사유형 인간이었는지

절대권력을 독식할 수도 있었는데

선황제들의 뜻을 잇는다며 자신과 함께

입양된 다른 형제와 공동 황제제도를 시행했다.

 

: 본서 빛깔

 

삶의 철학, 인간의 문제를 다룬 철학서이다.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치중한 사유를 담고 있다.

나로서는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학파의 차이를 알지 못했는데

그레고리 헤이스의 해제를 보면 이 책에는 은근히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스토아철학의 철학과 대조하며 독자가 스토아철학에 공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 감상 포인트

 

본서를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건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어쩌면 “인류 최초의 공리주의자”였던지도 몰라서이다. 그는 사람은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식의 서술을 거듭하고 있는데 후반부로 가면 “전체를 위해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부분이 잘려나간다 해도 전체에 이상이 없다면 그것이 나은 선택인 것”이라는 식의 발언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와 도시라는 공동체에 규정하자면 그건 로마이고 그보다 큰 공동체로 보자면 세계”라고 발언하고 있다. 이런 결론이 등장한 건 스토아철학 입장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유일한 덕”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고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철학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전체”, “자연”, “우주의 본성”, “세계의 본성”은 모두 “로고스”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 섭리,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신적인 이성”, 또는 “근원적인 이성” 또는 “창조의 주체”이자 “우주를 운영하는 법칙으로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성적이며 역동적인 힘” 달리 말해 이미 언급한 “섭리”로 파악하면 맞을 것도 같다.

 

공리주의의 시작이자 궁극 같기도 한 스토아철학에서는 “덕을 함양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는데 사실 그들이 말하는 ‘지혜, 정의, 용기, 절제’는 모두 “정의를 알아보고 실천하는 방법들”로 정의를 중심으로 정의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개인이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전체주의도 이런 시선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명상록]에는 “전체의 본성”, “우주의 본성”, “세계의 본성”이란 말이 반복되는데 “이 본성은 사람의 본성 속에도 있고 그건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식의 가르침으로 흐르고 있다. “로고스는 사람의 본성 속에도 흐른다”는 말이다. “신적 속성의 한 부분이 인간의 속성을 이루고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이는 기독교 ‘영지주의’의 견해와도 입장이 같다.

 

아우렐리우스는 세계가 순환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현대물리학도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물질은 보존된다고 보는 입장과 같지 않나 싶다. [나는 물리학으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제목의 과학 에세이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가 등장했는데 그 책의 저자분이 자신의 아버지가 철분과 칼슘으로 세계에 환원된 것으로 인식했던 것처럼,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도 “세계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죽게 마련이고 그러면 원소로 분해되어 다른 물질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대리석은 흙이 굳어서 된 것이고 가죽은 짐승에게서 난 것”이라는 논리다. “끊임없는 파도처럼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며 “생각이 결론이 되면 죽음이고 멈춤도 죽음이다”란 식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건 순환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늘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그 이전의 황제들과 뛰어난 인물들을 언급하며 “그들도 모두 죽었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연기가 나오면 떠날 수 있다”는 에픽테토스의 발언을 하기도 하는데 따로 검색해 보니 같은 스토아철학자 세네카도 “삶이 싫어지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자살에 대해 수용적인 입장이었다. 본서의 후반부에도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성적인 사람이랬나 우월한 사람이랬나 기억은 명확하지 않지만 “단호해질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 역시 “죽음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 듯하다.

 

“누가 나를 해치려 해도 내가 해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영향을 받을 일이 없다”는 식의 발언도 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에 한정해서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본능과 감각” 등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는 데 “이성을 제외한 것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그저 “절제”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아우렐리우스의 서술에 문제가 있었지 싶다. 서양철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성을 중시하는데 “인간적 특질은 이성만 있는 게 아니라 감정도 본능도 있다”. 그리고 감정과 본능 뿐 아니라 “생존 그 자체도 감각을 지각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성경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감정을 반영한 표현으로 시작하며 “사람은 먹고 마시는 낙으로 산다”는 잠언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입으로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씀도 성스러운 경험에서 나오는 “경이감” 역시 “감정과 이성이 어우러져서야 느낄 수 있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과거와 미래로 가지 말고 “현재에 살며”, 사물과 그 배경에 있는 원리랄까를 “알아가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한데 그를 위해서 살아가라고 권하고 있다. 알아가라는 건 아마 과거에는 과학이 아닌 철학이었겠지만 뭐라고 칭하든 “지적인 즐거움과 배움을 삶의 근간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본서의 내용은 다소 삶과 인간의 한 측면에만 주목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때론 흔들리고 주저앉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언가 명확한 게 있다고 말해주는 가르침에 사람이 갖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좋은 책”이란 생각도 들고 “스토아철학의 견해를 이해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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