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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그의 수필을 접한 건 처음이다. 엮고 옮긴이인 고봉만 님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인생의 주기마다 거듭 읽고 또 읽어왔다고 한다. [수상록]은 이 장르를 열었다고 인정받는 최초의 저작이라고 고봉만 님은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마도 이 둘의 서술과 주제를 펼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리 말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본서는 [수상록]에서 죽음에 대한 주제를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죽음이 만연한 이 시절에 죽음을 돌아보는 본서가 출간되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도 않을까 싶기도 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일 수도, 따스하게 또 다른 삶으로 이양하는 교차로이기도, 버거운 삶을 끝내며 다른 삶을 꿈꾸는 어두운 희망이기도, 또는 실패에 대한 수긍이기도 하다.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 만큼에 죽음의 의미가 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건 이건 상당히 선명하고 강렬한 경험이고 딱 그런 크기의 경험할 순간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두렵던 후련하던 그저 암울하던 각자마다의 감정을 갖게 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이기도 실제적이기도 한 경험일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것이 걱정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저자는 수상록에서 죽음을 화두로 가려 뽑아 옮긴 이 책의 제목을 이리 지었다. 본서에서 몽테뉴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려 애쓰기보다는 죽음에 단단해지라고 조금씩 죽음에 적응하라는 듯 말하고 있다. 서양 철학에서는 흔히 ‘메멘토 모리’를 말하는데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말의 깊이를 서양인들 그것도 과거의 서양인들은 명확히 느끼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몽테뉴는 1533년 태어나 1592년 사망했는데 그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몽테뉴의 청년 중년 시절은 종교 전쟁이 지속되었다. 내전으로 사회에는 질서가 무너졌고 사람들 간의 신뢰에도 금이 갔으며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오늘 밤 누가 나를 배신해 죽일지 모르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자유의 몸일지 확신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이다.
이런 시대 상황과 의료가 발전하지 않아 유아들이 거듭 죽어가던 상황에서 몽테뉴의 자녀들도 거듭 죽어갔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죽었고, 둘째는 7주 만에 죽었다고 하며, 셋째는 석 달 만에, 넷째는 며칠도 못 살고 죽었다고 한다. 다섯째만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몽테뉴는 “내 아이들은 모두 젖먹이 때 죽었다.”라고 자신의 글 행간에 적었다고 한다. 그는 둘째와 셋째 같은 경우에는 이름도 짓지 않았다. 아마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며칠도 못 살고 죽은 넷째도 이름이 있는데 그 역시 두려워서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 라보에시는 몽테뉴가 20대이던 시절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몽테뉴는 “나 자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적었다. 그의 동생 역시 사망했다. 그 시절에는 죽음이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죽음을 꺼려하거나 부정하려 하기보다는 수긍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영원불변함 자체도 사실은 시들어 힘이 없는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지가 다가오는 문장이다. 그는 영원한 것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그는 순간순간의 연속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안도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지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지금에서 느끼는 희열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의 지극한 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상이 그에게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했음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신은 조금씩 빼앗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은총을 베푼다. 이것이 노화의 유일한 미덕이다. 노화를 겪으며 조금씩 죽어온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 완전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오래 사나 일찍 죽으나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히파니스강에는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작은 동물들이 있다고 한다. 그 동물들 중 아침 여덟 시에 죽는 동물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오후 다섯 시에 죽는 동물은 노후에 죽는 것이다. 이토록 짧은 동안의 일로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그의 의식 속에서 점차 승화되어 가며 위트와 함께 다른 감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본서에서는 죽음만이 아닌 그의 의식들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늙어가며 자신에게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성숙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서 활력이 사라져 가면서야 멈추게 되는 것을 절제한다거나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영혼과 육체는 부부처럼 서로 의지하며 절제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쾌락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적 사유와 교육을 기꺼이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이다. 이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숙련되고 성장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말들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일 때와 직관적일 때가 교차하며 영혼에 이끌림과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시대에 주던 울림이 이 시대에도 동요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시간을 관통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의 영혼에게도 필요한 질문과 조언에 대한 궁금함이 인다면 들어봐도 좋을 말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