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 관한 책은 대중서만 읽어보았다. 작년 2024년 상반기에 [마흔에 읽는 니체]는 읽고 나서 니체 철학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고 12월에 읽은 [예술이 묻고 니체가 답하다]는 읽고 나서 니체의 인생을 조금은 엿본 것 같은 감상이 들었다. 물론 이 두 권 모두 니체 철학에 대해 개념만을 짧게 전하는 책이라 아쉬움이 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본서 [니체 극장]이라는 제목의 책을 알게 되었다.
본서는 니체의 철학과 인생을 연계해 접근 한 책으로 그의 저작들이 집필된 순서에 따라 연대기순으로 그의 일화들과 함께 그의 저작들을 돌아보는 책이다. 그의 정신세계를 조금은 엿볼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다. 책의 후반에는 하이데거, 들뢰즈 등 니체의 철학을 자기 나름의 척도를 지니고 해석해 간 철학자들이 언급되기도 하며 책의 말미에는 프로이트와 융이 니체 철학에서 받은 영향이 언급되기도 한다.
니체의 삶에 대해서는 이 책보다 [예술이 묻고 니체가 답하다]에서 더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기는 한데, 본서의 경우 분량이 분량이다 보니 (깊이가 크게는 느껴지지 않으나) 니체 저작들이 저술되어 나아가며 니체의 철학이 형성되어 간다고 할까 변화되어 온 과정이 그려지기는 한다. 다만 다양한 철학서에서 주제로 삼기도 하는 니체 철학이기에 본서에서는 개념 파악 정도로 만족해야 할 수준으로 서술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이데거와 들뢰즈가 각기 니체 철학을 해석한 경우를 보며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무언지 이해될 지경으로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아전인수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구나 싶기도 했다. 니체 철학에 대한 해설서를 따로 읽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해석이란 핑계와 함께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경우라면 원래 철학을 이해하겠다는 주제 의식으로는 원전을 읽는 게 낫지 해설서는 안 읽느니만 못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니체 철학은 낙타와 사자, 어린이로 니체가 분류한 의식 각성의 단계도 있겠고, 영원회귀 사상, 운명애(아모르 파티), 초인 사상과 권력의지(힘에의 의지) 등이 있겠으나 그의 생이 그려내는 주제로는 니힐리즘이 와닿았고 니체가 빠져있던 주제라면 영원회귀일 수도 있겠으나 본서를 통해서 가장 크게 와닿는 니체 철학의 근간은 초인 사상과 권력의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을 귀족이라고 호도할 정도로 특권의식이랄까 기득권 의식이 강한 존재였다. 그는 노동자층을 노예로 보고 귀족이 노예를 부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노동자 계층이 다수라는 이유로 주도권을 가질 가능성이 있기에 민주주의에 적대감을 표하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그가 말하는 초인은 노예들의 희생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 그와 같은 초인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노예 계층을 억압하고 착취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보던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렇다고 이런 초인이나 귀족들의 존재 이유가 무슨 커다란 이상적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초인은 그저 지배하는 과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도 장점도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초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언지 와닿지 않았다. 초인이 등장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희생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여정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너희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성장하도록 만들어 가는 여정이니 너희는 그저 죽은 듯이 사회적으로 희생하라는 것밖에는 그의 철학에서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희생을 통해 등장한 초인이 전하는 것이라고는 우월할 존재는 따로 있고 그런 존재를 위해 다수는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전할 메시지가 없다니 너무 황폐한 철학이지 않은가 싶다.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존재가 제시하는 것이 “현실을 받아들여라 너보다 더 높은 존재를 위해 살다 죽어라”라면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과연 초인내지는 극복인이기는 한가 싶다. 영원회귀와 운명애도 우스운 게 그냥 진리니까 받아들이라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자기 운명을 사랑할만 한이라면 자연히 자기 운명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고통의 과정을 이기고 무언가 의미를 찾은 이라면 운명을 사랑하기도 하고 영원히 삶이 무한 반복되더라고 지겨운 것 말고는 거부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할만 하지 않고 고통뿐인 삶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괴로움 뿐인 삶을 순환한다 해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건 억지고 강요고 무식이고 폭력이 아닌가 싶다. 영원회귀도 운명애도 배부르던가 어느 정도 물적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철학일 뿐이다. 이런 철학들이 보편성을 갖자면 모두에게 물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와 권한을 충분히 부여하는 과정이 선제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낙타, 사자, 어린이로 성숙해 간다는 니체의 의식 각성 단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수준인데 이 개념 때문에 내가 니체의 사고의 폭과 깊이가 단순하다고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 같다. 사람의 정신 또는 의식은 선형적으로 성숙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은 퇴보하기도 정체하기도 한다. 각 의식의 단계가 상징하는 바가 혼재하기도 하고 어느 시절에는 어린이였으나 다음 시절에는 오히려 사자도 아닌 낙타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직진하며 성장만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삶의 무게가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성장만이 아니라 퇴행도 하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성장만 하는 인생은 삶의 무게가 널널한 정도여야 가능할 것이다. 지워진 짐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감당하기 쉬운 정도여야 인간은 무리없이 저항없이 성장만 하지, 지나치게 무거운 짐일 때는 심지어 미치기까지 한다. 물론 니체처럼 병약하다는 것 말고는 별 무게 없는 이도 미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니체의 철학은 사실 유치해 보이는 면이 크고 그가 말하는 초인과 권력의지는 인간의 궁극과 본성의 일부를 이야기하는 면도 있지만, 그 초인이 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희생과 그런 희생을 통해 성장한 초인이 주장할 바를 생각해 보면 참 유치 찬란한 구조의 철학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유대 신앙과 기독교 구약 신앙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한다는 말이 결국 ‘생육하고 번성하라’와 ‘지배하라’뿐이었던 것을 보면 니체는 그런 서양의 전승을 그대로 답습했을 뿐이다. 그의 철학을 따라가면 초인은 대중을 위한 초인이 아니며 초인이 이야기할 것도 지배하고 피지배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정도만이 될 뿐이다. 대중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할 뿐이고 지배자에게는 군림하라고 말할 뿐인 야훼의 선언과 무엇이 다른가?
니체는 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신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예수의 철학과 상충할 뿐 구약이나 유대의 철학과는 하등의 다른 부분이 없었다. 결국 그는 게으른 연설가일 뿐이다. 이게 내가 느낀 니체 철학에 대한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