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제국>을 읽고 창덕궁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유약하나 강단 있는 말을 외쳤던 <영원한 제국>속 이인몽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 어차피 소설은 허구,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허구. 나는 그 허구 속에 한번 몸을 담그는 것이겠지.
며칠 전, 흔해빠진 묘사지만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위로 하고 창덕궁에 갔다. 정조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 노론과 남인의 사람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달려 나갔을 그 궁궐을 내 발로 걸어보았다. 규장각 서고가 있는 주현루에는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이 계단에 살포시 놓여있었다. 나는 발을 쫑긋 세우고 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여기서 이인몽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 길을 정약용과 함께 걸었을 것이다.’
‘여기서 장종오는 <시경천견록고>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쇠락한 누각. 빛이 바랜 단청이 스산한 느낌을 더했다. 정조가 학문연구를 위해 만들었다는 2층 누각 주합루. 1층은 규장각 서고이고, 바로 거기서 장종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영원한 제국>의 기나긴 하루 여정이 시작된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에 무지몽매하기도 했지만, 저자의 “유신”에 대한 입장에 언뜻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과연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정조는 강력한 왕권중심주의 국가를 원했으나 당시 실권세력이었던 노론은 신권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고, 그로인해 자주국가를 수립한 모든 국가들이 겪었던 절대주의 국가체계를 우리는 수립하지 못해 조선이 망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홍재유신이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는 160년이나 후퇴했으며 후에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논리는 뭔가 그 극단성으로 인해 무서운 감이 없지 않지만 정조의 개혁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여지를 준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상관없이 내가 이 <영원한 제국>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이인몽’이란 인간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다. 유약하고 성실하며 융통성 없고, 꿈과 희망은 큰 그런 선비였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부당한 처사에도 굴하지 않으며 한 점 티끌없는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순수청년.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특히 내시감 서인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했을 때 이인몽이 몸을 날려 임금을 엄호했던 때와, 그 모든 것들이 정조의 조종에 의해서 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가 느끼는 충격-저자는 ‘삶의 심연’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이 추악한 권모술수라고, 더러워진 전하에게 충성하며 자신도 더러워 질 것이라고 고뇌하는 이인몽 옆에서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결국 저자가 꿈꿨던, 혹은 주인공 이인몽이 꿈꿨던 '영원한 제국'에 대한 이상은 한갓 꿈으로 끝나버린다. 정조는 갑작스레 죽게 되고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던 이인몽은 그후 30여 년을 떠돌아 다니며 이름 없이 살다가 정조의 곁으로 돌아간다. 그간 벌어졌던 수많은 일이 일장춘몽처럼 표표히 흩어져버린다. 정조의 부름을 받았던 추억이 이인몽의 스치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제국’은 이제 꿈으로만 남는다.
아주 오랜만에 생각의 표피를 떠도는 소설이 아니라 곰곰이,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는 소설을 만나서 참 즐거웠다. 저자와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내가 혼자 고민했던 것도 좋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인몽과 박지원의 대화가 생각난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사람은 그저 묵묵히 제 소신대로 사는 것이오. 내 피가 뛰는 가슴으로 느끼고 내 머리로 생각한 것이 그렇거늘,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2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