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과연 진정한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 세상에 던져진 모든 선과 악, 그리고 고뇌
와 절망은 누구의 창조물인가. 그것이 만약 신의 창조물이고 신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지
나지 않는다면 인간사에 던져진 그 모든 역경은 결국 신의 의지란 말인가. 따라서 어떤 죄
악도 상처도 결국은 신에 의해 예정된 일부이며 우리의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인
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카인은 신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심판 당해
야 하며 배고픈 민중들은 미래가 없는 가난에 허덕여야 하는가. 그것이 신의 무책임한 방임
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절대자(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작가 이문열
은 이 물음에 대한 고찰을 '사람의 아들'로 대신한다.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이문열이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이런 어마어마한
작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십대 중반에
중편으로 완성했다 이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문열은 79년 이 작품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장편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의 작가적 출발점과 이후 작품 활동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어찌하여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처절했던 인생사와 맞물려 있다. 남로당계 간부였던 아버지의
월북과 가족의 이산, 월북자 가족에 대한 감시와 그에 대한 피해의식이 빚은 가혹했던 어린
시절의 삶, 이러한 유랑과 방황의 유년기가 청년 이문열로 하여금 사회와의 소통을 차단하
고 홀로 침전하여 관념의 늪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 그를 둘
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람직한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회의와 환멸과 상실의 정서 그 자체였
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책 세계 속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척
하며 그 선험적 비판철학으로 인간과 삶의 탐구에 골몰했다. 그것은 그의 기구한 성장기에
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의 탄생 역시 청년 이문열에게 필
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사람의 아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문열이 이 작품을 완성시켜 출판
사를 찾았을 때 무수히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
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 째로 70년대의 문단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유신 독재에 대한 사회학
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작품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고 두 번 째로 종교 문제를 정면
에서 다루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추리'소설 적인 색채와 '판타지 무용담'적인 면모가 당시 '순수문학'(예
술로서의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둔 문학 - 필자는 아직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만을 고집해온 국내 문단에 달갑지 않은 사생아로(관념주의의 옷을 입은 통속소설 정도로)
비쳐졌기 때문이리라.
정말로 이 소설은 굉장히 '추리소설'적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전의 히트를 거둔 '다빈치
코드'와 닮아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사건 전개나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 방식, 종교 문
제를 다룬 지적 스릴러의 요소 등이 상당부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닮은 점이라면
방대한 지식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다는 점이겠다. 이문열은 이 작
품을 쓸 때 그 자신의 엄청난 독서량에 의해 이미 베스트셀러의 공식을 꿰차고 있었으며 그
노하우가 응축된 작품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정
말 잘 읽힐 수밖에 없는 정교한 오락적 장치들의(추리 소설적 요소를 가미, 미스터리를 증
폭시킨 것, 그리고 신화적 인물의 재해석과 그 파란만장한 여정 등이 치밀한 액자형 교차적
구성으로 강렬한 흡입력을 제공한다) 경지를 보여주며 출간 즉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
했다. 그리고 밀리언셀러로 등극하여 지금까지 현대 고전으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오락적 측면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이 작
품에는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이다. 필자는 아직 이문열의 모든 작품을 읽
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한 단편 몇 편, 그리고
'젊은날의 초상'이 전부다. 하지만 이문열 연구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대부분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책도 역이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이 작품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최고 작품으로 보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를 말한다면 이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색채,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고 이채로운 성찰은 사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면적인 모습으로 반복해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야말로 이문열 문학의 뿌
리요 모체인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이문열 작품은 '사람의 아들'로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맞물려서 진행된다. 액자 속의 '아
하츠 페르츠' 이야기와 액자 밖의 민요섭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진행된다. 민요섭은 비상한 두뇌와 세상을 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신앙심 깊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민중 구제라는 실천 신학에 빠져들게 되고 그후 홀연히 자취를 감
추었다가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살인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남 경사는 민요섭의 자취를 더
듬어가다 그가 남긴 노트에서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소설을 접하게 된다. 민요섭이 쓴 소
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와 남 경사가 수사하는 민요섭 살인사건이 서로 맞물리며 소설
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진적인 방식으로 단서와 비밀들이 공개되어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거의 일대일의 방식으로 대응시
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인 일역을 하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닮아 있고 그래서
어느 한 쪽을 탐색하면 저절로 다른 한 쪽까지 탐색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민요섭의 행적
속에 묻어 있는 의문은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고,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 속
에 묻어 있는 의문은 민요섭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 형성되어진다.
그러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러한 구성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폭발하듯 쏟아지는
강렬한 주제의식이다. 이 주제의식은 이문열 스스로가 성장기를 통해 억제하기 힘들었을 사
회와 자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이 작
품의 위대함이고 필자는 이 위대함에 전율했다.
무엇보다 필자를 전율시킨 것은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가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
원적인 물음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여정 중 신에 대한 회의, 방황, 반항에 해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묻는다. 신의 말씀에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다수의 군
중을 '죽음' 말고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째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오로지 '죽음'으로
만 구원하려 하고, 공허한 천국의 약속만으로 굶주림과 모진 고난을 겪게 하는가. 그것이 신
의 자비인가. 신의 사랑인가. 또,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 모든 가르
침의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 교훈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 아닌가. 신으로
인해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인간과는 별 상관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 아
닌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절대자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
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어째서 사악한 무리가 사악함을 품
지 않도록 하지 않으며 어째서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당시까지 누구나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종교적 위대함에 대한 강한
반기였다.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 그리고 예수를 비롯한 무수한 신적인 존재들을
내세워서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한다. 그래서 그때까지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근간을 뒤흔들며 무엇이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다각도의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작가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
었던 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시의 견고했던 독재 권력을. 아무튼,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필
자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필자가
무신론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아하스 페르츠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다
루어진 신화와 역사의 날조는 역시 절대적 권력가들의 횡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혹이 더
욱 짙어졌다. 정말로 신이 절대적 선의 존재라면, 어째서 악은 만들었는가. 어째서 오늘날
가난에 허덕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가. 열차 전복 사고를
구경만 하는가. 전쟁으로 죽어 가는 무수한 인명들을 구하지 않는가. 어떤 신성한 이유들을
내세워도 이것은 정말 신의 방종이며 모순이다. 신화와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의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음이나 의혹이 아닌 절대적인 맹신인 것이
다.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유혹하려 했던 사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
만 소설 속의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사악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민요섭도 마
찬가지다. 그들은 신앙에 의혹을 품었을지언정 배고픈 민중 속으로 몸소 뛰어들어 그들에게
빵을 제공했다. 두드리는 자에게 현실 속에서 구원의 문을 열어준 이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은 신의 이름으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창
조한 신, 심지어 그가 사탄으로 몰아세운 모든 악마들도 사실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
엇이란 말인가. 이 이해할 수 없는(신의 아들이라면 이해했겠지만, 사람의 아들인 필자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인상적인 비유와 현란한 수식의 말씀으로 덮어버리려는가.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민요섭의 종교로의 회귀를 조금은 갑작스럽게 결정짓는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최후는 분명하게 결론짓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에 대한 몫일 테다. 작가
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부정을 방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최종 선택은 책을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의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의
간극을 열어 보이고 신과 인간에 대한 환기를 통해 맹신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까지가 작가
가 제시한 전부다. 그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들은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다. 난장이 가
족이라면 어땠을까.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래서 사회와 어떤 방
식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 중 어느 것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 테두리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절대적 권력자들이라면 테두리 밖의 인간들에게 무
엇을 선택하게끔 종용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하스 페르츠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절대자와 맹신자, 카인, 그리고 헐벗고 배고픈 '사람의 아들'들은 여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