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만 해왔지 사실 난 역.알.못. 이다.그래서 이 책이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야? 라는 말 밖엔... 조선은 정말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관료와 통치자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어린 시절 책장에 있던 위인전? 시리즈에서 고종은 불쌍한 왕이였던걸로 나와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생생히 기억나는 게 이완용은 친일파이며 정말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기재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인식 속의 그는 나라 팔아먹은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책에 의하면 고종실록에 기술되어 있길 그(들)는 고종이 시켜 어쩔 수 없이 을사늑약에 서명한 것으로 나온다. 단지 그들은 고종의 엄한 명에 의해 서명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종은 단지 불쌍한 황제로 알려져 있고 힘없는 충신들은 후대의 역적으로 몰려 자손들까지 욕먹고 있다. 물론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부패한 공무원은 맞으니 두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진짜 빌런은 고종이였는데 그는 단지 후대에 불쌍한 황제라 불리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셨을 작가님 대단하시다.
#조선은망할수밖에없었다2
#이행기 작가
56년 치의 철종,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38년 치의 비변사등록 외에 약 300여 권의 책,
250여 편의 학술논문, 90여 편의 석박사 학위 논문 등 총 640여 편의 참고자료
1904년 의정부 참정 신기선이 상소를 올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호소한 것이 예언이 되었고, 그것은 "백여 년 동안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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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간 오로지 주자학만 '정학'으로 숭상하고, 서양의 학문이 나 과학 등은 '인륜'을 해치는 '오랑캐'의 학문으로 철저히 배척하던 조 선이었다. 그런 오랑캐'나 '왜 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조선은 인재 육성도 하지 않았다. 세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부도난 재정, 세금이 들어오지 않자 개탄' 하는 고종, "오합지졸" 의 군사, 국제법도 외국어도 모르는 외부 대신, 중국도 따르지 않는3-4천 년 전 중국의 의복제도를 고집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차라리 머리털을 보존하다가 (조선이) 망하는 편이 낫다"던 유학자들, 능을 옮 기고 궁전을 증축•보수하고 각종 왕실 의례에 예산의 10% 이상을 지출 하는 조선 왕실. 그러나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는 굶주린 백성, 이것 이 1차 사료에 나타나는 조선의 모습이고, 이러한 것이 1905년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어느 사료에서도 이런 조선을 살리려는 조선 지배층의 행동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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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후 일본의 전리품이 된 조선이 해야 했던 것은 일본과의 전 쟁이었다. 그러나, 인구 3백만 명도 안 되던 대만은 청일전쟁 후 1만 4 천명이나 목숨을 바치며 일본에 항거했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이 아니라 고종의 명령에 따랐던 이완용 등 다섯 대신을 이른바 "을사오적 으로 낙인을 찍으며 이들에게 돌을 던졌다. 조선 지배층과 백성은 그렇게 조선 내부에 '역적'을 만들었고, 고종과 조선왕조는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런 조선왕조가 조선충독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으며 1945년까지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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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놓인 조선
1883년에 조선의 세관보좌관으로 임명돼 제물포에서 근무한 영국인 던간이 2월 중순(양 3월 중순)에 <차이니즈 타임즈>에 조선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서울 은 음모와 부패, 폭정, 지독한 야만이 끓어오르는 곳이며, 조선은 음주 와 쾌락에 빠져 있고, 정부는 완전한 파산 상태에 있으며, 조선은 "지옥 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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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장례식 비용지출 기록을 보면 122만 냥에 달한다. 그러나 백 성들의 삶은 고종 자신이 털끝까지도 모두 병이 든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고, 함경도 백성들의 러시아로의 탈주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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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백성들
함경도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자 7월에 고종이 북관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 국경으로 넘어가 사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것은 틀림없이 마구 긁어모으고 벗겨가는 학정을 견디지 못 하고 살던 땅을 떠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그런데 이것은 14년 전인 1876년 8월에 고종이 "기근에 시달리고 부역 에 고달프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이 무 려 몇천 몇백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라며 함경도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의 내용과 차이가 없다.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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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를 "강도들"이라 부른 영국 인류학자
영국인 인류학자 랜도 가 1890년 말부터1891년 초까지 조선을 방문했다. 그가 본 조선 여성의 생활은 "노예의 생활"이었고, 조선의 관리들은 무자비한 강도들"과 같았다. 조선은 백 성들을 쥐어짜는 무서운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백성들이 돈을 벌면 관리들에게 모두 뺏기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조선인 의 말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 내용은 1886년 김옥균의 상소 내용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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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점쟁이에 심취한 왕과 왕비
고종과 왕비가 무당이나 점쟁이에 심취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중 에는 조선 주재 공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것도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이 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데, 고종실록 8월 21일 자에 있는 전 정연 안효제의 상소는 아주 드물게 이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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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공사가 본 동학난의 원인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학난에 관해 5월에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관리들의 뇌물 및 착취가 큰 원인이었다. 국왕은 유약하고, 백성들 의 생활 개선, 제도 개선 등 중요한 개혁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조선 정부가 동학난을 진압하더라도 폭동은 머지않은 장래에 더 크게 일어날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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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의 매개' 기능을 상실한 엽전
오스트리아인 여행가 헤세 바르텍이 부산을 여행할 때 환율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부산의 짐꾼들의 가장 흔한 짐은 돈이었는데, 1달러를 바꾸면 엽전이 6천 개에 달했는데, 그 무게가 엄청났다. 따라서 그는 일본이 조선에 은화를 도입하면 부산 과 조선 전역의 가난한 짐꾼들은 돈벌이 수단을 잃게 될 것이라 했다.이러한 엽전의 환율과 무게 문제는 1903년에 조선을 여행한 러시아 인이 남긴 글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1903년에 러시아돈 100루블 어치의 엽전은 5만 개 이상으로 무게가 123kg에 달해 이를 운반하려 면 말 한마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이미 오래 전부터 엽전은 화폐의 기능 중 가장 기본적인 거래 비용을 줄여주는 '교환의 매개 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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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발생과 인구 변동
1895년 5월에는 평안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지고, 기근으로 전국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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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선
왕비를 만난 적 있는 영국 여행가 비숍은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급히 경성으로 왔는데 그녀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너는 경성과 경기도, 황해도, 평양 등지를 여행 하면서,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 봐야 관리들에게 결국 돈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빈곤이 자신들의 "최선의 안전"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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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주변의 상황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은 몰락의 길로 가고 있었고, 미국은 조선에 중 립(무관심)을 지켰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로 통과하도록 9월 에 청과 동청철도조약을 맺음으로써 영국. 일본과의 갈등은 커져간다.
일본은 이런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삼국간섭 이후 청일전쟁 배상 금의 거의 모두를 육해군 확장을 위해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러시 아는 조선이 아닌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러시아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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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가져가는 세금
3월 2일에 탁지부에서 보고한 내용이 고종실록에 있다. ..백성들에 게서는 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기어이 준봉(14: 징수)하고는 자기 손 에 들어오기 바쁘게 빚을 주어 이자를 받기도 하고 팔아서 이득을 보기 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찰사는 규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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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본 러시아공사들
1885년 8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하여 1897년에 멕시코공사로 이임한 전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10월에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취소됨)에 왔다가 경성에 다음 해 4월까지 체류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본 대한제국은 여전히 혼란했고, 음모와 술수. 권력 남용이 횡 행하고, 백성을 쥐어짜는 것도 똑같았다. 군인의 수는 배로 늘어났으나 규율이 없고 복장은 남루했고, 관직은 연출이나 매매로 주어졌으며 교 체가 빈번했다. 또 백성이 내는 세금은 많아졌지만 국고에는 항상 돈이 없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쓸 돈이 없었다. 반면에 왕실의 사치품 구매 와 화려한 행사, 궁궐 수리와 신축, 사원•왕실묘의 건립과 내시, 점쟁이,무당 등에게 막대한 돈을 쓰고 있다고 썼다.주일 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도 대한제국의 국내 정치가 완전히 해체 되었고, 대한제국은 외국의 원조 없이는 스스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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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한일의정서 체결 다음 날, 알렌은 본국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피보호 국으로 한다는 조항에 고종이 서명했다고 보고했다. 3월 1일 황성신문 도 논설에서 한일의정서 체결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음 을 의미한다며 분노했다. 그런데 미국공사와 황성신문도 알았던 이 조약의 의미를 조약을 직접체결한 대한제국의 신하들과 고종은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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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상조약' 초안
이토가 고종을 알현하고 전달한 메이지 천황의 친서 내용은 '대한제국과 일본 장래의 안녕을 절망하는 진실된 마음을 친히 폐하에게 알리 기 위해서' 이토를 파견한다면서, 대한제국은 불행히도 아직 국방을 완비하지 못했고 자위의 기초도 굳건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동아시아 장래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양국이 뭉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에 명령해 방법을 세웠으니 경청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11월 15일, 이토는 고종에게 '한일협상조약(을사조약)' 초안을 제출하 는데 고종실록은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 를 접견하였다. 협약문 초안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날. 고종은 이토에게 일본이 외교의 실체를 취하더라도 사신의 왕래 등 형식적인 명목은 대한제국에 남겨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토는 외교는 형식과 실체를 분리할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외교 상황이 유지되 면 영토 문제 등으로 동양이 다시 재난에 빠질 수 있다며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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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비판 상소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이 협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라며 이토에게 위로의 칙어까지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서울 상가는 철시하고, 19일부터는 보호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 하라는 원로대신과 현직 관료, 지방 유생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타고, 이근택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조약 체결 다음 날 내부대신 이지용 등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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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신기선이 상소를 올린 날. 의정부 참정 윤웅렬도 상소를 올려 당시의 위급함을 경고한다. 고종실록에 있다. . 요즘 여러 신하들이 아린 말 이 절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폐하가 마치 믿는 이가 있는 것처럼 들은 체 만 체하니 신은 참으로 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현재 민심의 소동은 뜨거운 철판 위의 벌레 같 고 외적의 침노에 대한 급박함은 두 호랑이가 고깃점을 놓고 싸우는 것 과 같습니다. .."라 했다.이처럼 신하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극언까지 동원해 가면서 고종이 분 발하여 나라를 바로잡기를 바랐다. 그러나 52세의 고종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손을 대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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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비판 상소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이 협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라며 이토에게 위로의 칙어까지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서울 상가는 철시하고, 19일부터는 보호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 하라는 원로대신과 현직 관료, 지방 유생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타고, 이근택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조약 체결 다음 날 내부대신 이지용 등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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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주기를 상소한 다섯 대신 고종실록 12월 16일 자에는 참정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 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등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가 있다.
"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 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 일 뿐입니다.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 17일 ... 신들 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 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공사가 어전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 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은 전제국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6)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 하였습니다. …. 대사가 궁내부 대신 이재극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 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 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를 전하였습니다. ... (대사가) 곧 이재극에게 다 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 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 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대신뿐입니다. 주무대신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 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 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 삭할 곳은 법부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 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 이 자리에서의 사실 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을 '나라를 팔 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 못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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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 속히 법사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라며 자신들은 그날 밤 고종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음을 구체적으로 아됐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 로운 때에는 오직 다 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 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 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며 책임을 신하에 게 돌리고, 자신이 나서서 신하를 보호할 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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