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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은 페미니즘한테 욕먹기 딱 좋은 학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음경, 아버지와 같은 정신분석의 주요 용어는 외관상 분명히 남근중심적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것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는 다 마초라고 판단하는 것만큼 유치하다. 오히려 그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해 온 전제군주인 ‘이성’의 배후에 있는 ‘무의식’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기획은 맞닿아 있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프로이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도 성급하긴 마찬가지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에게 언어학을 선물한다. 다시 말하자면, 라캉은 정신분석에 언어학을 도입해서 프로이트에게 씌워진 생물학적인 혐의를 상징적인 것으로 대체한다. 대표적으로 음경(penis)과 구분되는 ‘남근(phallus)’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작업들을 통해서 성차이에 관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입장은 규범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이 남근중심적이라면, 그 까닭은 정신분석학이 개별적 인간 주체를 통해 굴절해서 지각한 인간 사회의 질서가 가부장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17p) 라캉의 성차화 공식은 개개인이 여성 혹은 남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성은 생물학적인 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남근기능과 자신을 동일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또 상징계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여성에게서 향락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도 라캉은 페미니즘의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성차화 공식에 지면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라캉의 성차화 공식이 페미니즘에 대해 갖는 의의’정도가 더 적절한 제목인 것 같다. 문제의식만 살펴보면, 라캉을 적극적으로 독해해나간 페미니스트들을 소개했다면 주제를 더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은 그렇지 못하다. 문고본을 찾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보면,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 아이콘 시리즈를 찾는 사람들을 (출판사의 소개대로) '멀게만 느껴졌던 세계의 지성들과 대화를 쉽게 나누고 싶어하는' 문외한이 대부분일 텐데, 이 책은 ‘라캉의 성차화 공식’만 소화하기에도 벅차다. 끝에 붙어 있는 페미니즘 영화비평 논쟁은 ‘응용’단계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다. 핵심개념 설명이 붙어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라캉의 ‘성차화 공식’의 소개로만 내용이 채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라캉이 그만큼 난해한 사상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폼나는 사상가와 폼나는 주제를 결합시켜서 알맹이만 쉽게 소개한다’는 아이콘 시리즈의 기획은 적어도 라캉에 한해서는 무리였다. 입맛에 맞게 골라먹기에 라캉은 만만치 않은 상대이며 라캉에게 낯설은 독자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들여서 두 번, 세 번 혹은 그 이상 정독해야만 한다. 그 노력을 다른 라캉 혹은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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