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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비판할 때 쉽게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봉건적 잔재와 권위주의이다. 이런 틀을 가지고 가족문제를 접근할 때에 생기는 난점은 ‘근대의 완성을 통해 가족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21면) 한편, 맑시즘은 공사 영역의 분리 속에서 재생산의 영역으로 가족을 의미화한다. 소유관계가 폐지되면 남성 지배의 물질적 토대가 상실되고 그에 따라 현재와 같은 의미의 가족은 소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노동운동진영을 젠더중립적인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많은 것을 은폐한다.

저자 권명아는 이 책을 통해서 위의 두 관점이 간과하는 영역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가족이 근대인들의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 형성의 ‘상상적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저자는 개인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혁명적 과정의 배후에 깔려있는 ‘가족의 상상력’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97면)

가족 이데올로기는 근대의 무의식이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을 아비 잃은 고아로 인식하였다. ‘소년’교육에의 몰두는 타협적이고 개량적인 노선을 지향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4.19세대는 ‘청년’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타율적인 근대화 과정을 겪은 ‘소년’세대와 달리 미래의 담지자로서 당당함이 있다. 반면 80년대의 ‘동지’는 소년, 청년과 같은 부르주아 개인주의적 표현을 거부한 집단적 자기규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새로이 구성한 정치적․사회적 관계 모델에서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 ‘남성’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중심적 권력관계’가 본질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체는 아니다. 부녀에서 부부, 부부에서 동지로 그 관계는 변화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어디까지나 ‘가족적인 상상력’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동지’라는 중성적이고 집단적인 주체조차 여성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폭력 속에서 가능하다.(125면)

저자는 소설 속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성격 묘사, 대사, 의식의 흐름 등을 포착하면서 근대적인 주체가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어떤 식으로 가족을 이미지화하는지 설득력있게 분석한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전쟁 후 극한적인 상황에서 무사회적 고립자들이 선택하는 역설적인 자기구원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3장) 4장에서 다루는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의 작품은 민중문학과 여성문학이 갖는 공통분모와 갈등을 알게 한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가족의 강화’가 삶의 절박함이란 토양 속에서 ‘無대안’이란 비료를 줄 때 무럭무럭 자라는 식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둬야만 한다. 대중에게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운동은 현실로부터 일탈과 초월을 부추긴다. 절망적인 고립감, 도피처로서 가족 설정, 구원자로서 어머니 표상, 혈육의 수사와 낭만주의 미학. 그 식물이 맺는 열매는 파시즘이다. 전후부터 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 파시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의 집단적인 무의식과도 관련이 깊다. 삶의 절박함 속에서 자라는 식물이 해방이 될지, 파시즘이 될지는 ‘누가 어떤 비료를 주느냐’에 달려있다.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가족적 무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 그것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와 공포, 파시즘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결국 가야할 길은 한 가지다. 가족의 배치를 넘어서는 것. 정서적인 유대를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만남의 장을 생성하는 것. 해방을 가져오는 ‘새로운 상상력’은 그 속에서 배태된다. 물론 이는 ‘가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화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의 망. 혈연, 지연, 학연, 성별, 계급도 마찬가지다. 혁명은 외부에 있지 않다. 혁명은 자신에게 각인된 지배적 습속을 인식하고, 들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낯섦, 차이를 즐거움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이질적인 장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이다. 저자의 말대로 가족의 기원을 묻는 것은 출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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