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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칸트와 달리 리오타르에게 숭고미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된다. 그에게 재현할 수 없는 대상은 근본적으로 숭고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숭고의 대상은 자연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 세계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심지어 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숭고한 대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모든 것 혹은 지금 이 순간에나타나는 사건 자체일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믿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세계야말로 재현할 수 없으며 가장 숭고하다. 따라서 이러한 숭고한 순간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화도 불가능한 이미지일 것이다.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바넷 뉴먼 BarnettNewman, 1905~1970의 작품 <숭고는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 1950~1951이를 잘 구현한다. 어떤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 형상을 나타내는 수직선 이외에 빨간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화면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의 현실적 체험이지만 어떤 재현적인 체험도 아니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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