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불안한 순간은 밤에, 해변을 따라 함께 걸을 때 찾아왔다. 힘차게 쿵쿵거리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피비는 환희에 젖었지만 그는 겁을 먹었다. 수많은 별은 그가 죽을 운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몇 미터 밖에서 천둥소리를 내는 바다-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물 밑의 검디검은 악몽 - 와 만나면 망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아늑하고, 환하고, 가구가 별로 없는 집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한국전쟁 직후 사나이답게 해군에서 복무할 때는 광대한 바다와 커다란 밤하늘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한 번도 조종(弔鐘)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이런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안간힘을 써야만 피비에게 그것을 간신히 숨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더 견실한 삶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