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어느 작가님이 발굴해 번역한 책들은 특별히, 기어이 찾아 읽곤 한다. 배수아 작가님께서 번역하시는 동유럽 소설과 정보라 작가님께서 번역하신 러시아 소설이 그렇다.한 말 또하고 또 하는 장황한 문장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불륜과 사랑과 명예가 어쩌고 하는 것도 취향이 아닌데다 신을 찾아 참회하는 이야기는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후 더욱 더 러시아문학과 멀어진 상황이다.'아글라야 페터라니'라는 낯선 동유럽 작가의 책을 배수아작가님을 믿고 선뜻 집은 것 처럼 이 책은 정보라 작가님을 믿고 폈음을 고백한다.- 진심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느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을 선택하겠다.총독 암살이 목표인 다섯 사람이 모스크바에 와 있다.스물둘의 대학생이자 사회주의자인 하인리히. 벽돌공장 노동자 출신 표도르, 신을 믿는 사회주의자 이반(바냐), 조지를 사랑하는 폭탄제조 화학자 에르나, 유부녀인 옐레나를 사랑하는 테러리스트 조지. 정치적 정당성을 이유로 살인을 하는 테러리스트들. 그들에게 혁명, 이념, 신, 사랑, 삶은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살인이 목표가 되었을까.무엇의 이름으로 살인을 향해 가는가? 테러의 이름으로, 혁명을 위해서? 피의 이름으로, 피를 위해서?나는 내가 왜 테러의 길을 가는지 모르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는지는 안다.하인리히는 이렇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표도르는 아내가 살해당했다. 에르나는 사는것이 수치스럽다고 했다. 바냐는...... p.20암살 폭탄 테러에 가담한 다섯은 모두 다른 생각중이다. 하인리히는 사회주의의 완성과 짝사랑하는 에르나를, 안드레이는 당을, 표도르는 노동자의 삶을.그러나 신의 사랑을 믿는 바냐와 무엇도 믿지 않는 조지가 살인의 이유에 대해 나누는 거침없는 자기성찰은 흑백처럼 서로 반대면서 거울을 마주하듯 닮았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대의와 명분, 시대의 업을 짊어진 테러리스트의 이야기 속에서 심연을 날것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내 안에 숨겨둔 조지를 들킨 것 같기도.- 이반(바냐)그거 아나.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바친다는 건 쉬워.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지. p.45살인하게, 다른 사람들이 살인하지 않도록.살인하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이 세상을 밝히도록.p.83
- 조지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또 장관을 죽이는 건 괜찮고 혁명가는 죽이면 안 된다고 한다. 혹은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나는 어째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째서 자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좋고 독재 권력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나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p.14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존중하는 마음도 없다면?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 죄에 대해 말한들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나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내가 보매 창백한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그 말이 발을 디디는 곳에는 풀이 시들고, 풀이 시드는 곳에는 생명이란 없으며, 이는 즉 법도 없다는 뜻이다.왜냐하면 죽음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p.76그동안 조지의 살인은 명분이 있었다. 살인의 정당성을 찾지 못하고도 암살테러를 계속 해 나갔던 조지가 명분없는 살인을 저지른 후 내면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조지는 스메르댜코프도 라스콜니코프도 되지 못했고, 혁명의 정당성도, 선과 악도 삶과 죽음의 경계도 흐려지고야 만다. 나는 혁명을 위해 살인했나? 아니면 나를 위해 살인하고 있나? 아마 혁명을 위해 시작했겠지만 반복된 살인은 염증과 회의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악마를 보았다 中>
니체가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살인에 명분과 정당성을 찾는 자신신이 살인괴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은지 신이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을것이다. 신은 답이 없으니 사랑에라도 매달려보고 싶었을 것이다.내게는 덧없는 에로스라도 믿어본 적없는 신의 말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자신은 아직 미치지 않았다고, 아직 인간의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통곡하며 기록한 일기로 읽혔다.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며조지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것은총리가 아니라 괴물이 된 자신이었을거라고 생각했다.사빈코프.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진보적 사회주의자.러시아 재무장관과 모스크바의 총독 암살을 성공하고 기록한 테러리스트이자 작가.여기까지만 알았을 때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권력독점에 맞서 싸운 혁명가에서 별 백만개를 더한다.(I think 독점권력은 적보다 더 위험하다)나는 사람을 죽였다. 이제까지 나는 명분이 있었다. 나는 테러의 이름으로, 혁명을 위해 죽였다. 러시아를 위해 그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 나는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경계선도 없고 차이점도 없다. 어째서 테러를 위해 죽이는 것은 좋고, 조국을 위해서라면 필요하고, 저신을 위해서는 불가능한가? 누가 내게 대답할것인가?p.170나는 지상 낙원도 믿지 않고 하늘의 낙원도 믿지 않는다.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노예조차 되고 싶지 않다.나의 모든 삶은 투쟁이다. 그러나 무엇의 이름으로 투쟁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원할 뿐이다.p.173어째서 나는 살인했는가? 죽음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그렇다. 나는 믿었다. 살인해도 된다고.그러나 지금 나는 슬프다. 나는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랑도 죽였다.p.174
덧 1 ) 정지돈작가의 추천사에서 막혔던 소설의 출구를 <창백한 말> 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뜨겁고 치열한 글이라면 당연히, 너무나 당연히.덧 2 ) 세 번 읽음, 와.........정말 좋다. 얼마나 좋았으면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오는 성경 인용구절마저 더 알아보고 싶어졌을 지경. (수학책보다 성경을 더 싫어함)덧 3 )이 작품 묘하게 정보라 작가님이랑 닮았어... 히히.덧 4 )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소설집>도 그렇고 <창백한 말>도 그렇고, 뒤통수가 얼얼할만큼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되서 정말 좋다.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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