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과 굴김치,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사랑할 수 없지만 끝내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의 시간

주중 스트레스와 울화를 걷어내고 말끔한 주말로 진입하기 위한 거름망으로 일곱 개의 작품 중 이미 읽었던 세 작품을 가볍게 시동 걸 듯 읽었다. 그리곤 야식으로 주방에 있던 사과 하나를 씻어왔다. 사과 꼭지 옆, 유달리 볼록하게 올라온 부분을 주사 놓듯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턱을 벌릴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입에 넣었다. 와작. 온전한 사과 하나가 부서지는 소리. 파괴의 음악. 어떤 물질이 깨지면서 내는 파열의 소리가 경쾌했다. 한 세계가 깨지는 일을 쾌감으로 느끼는 사람의 글은 언제나 파열의 글이지 않을까, 언젠간 그런 글을 쓰면 좋겠다. 깨어지지 못할 벽 앞에 주저앉은 존재에게 도끼가 되어줄 글을. 같이 도끼를 휘두르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기면 나란히 쪼그려 앉아 굳은살을 뜯고 피가 나면 밴드를 붙여주며 깔깔 웃는. 이보다 더 허황된 상상이 어딨어. 어쩌면 SF보다 더 상상에 근거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 그 상상과 허상의 균열 사이로 청포도와 비슷한 엔비 사과의 향이 퍼졌다.
책을 살 때 사은품으로 받았던 방향제를 뜯었다. 색이 예뻤고, 단단한 종이의 물성이 썩 마음에 들었고, 향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그러나 그 책갈피에 쓰인 언어가 전달하는 의미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향을 버티게 한다. 조안이 단희에게 건넨 유리병 속 향기가 이렇지 않았을까.(<숨그림자>) 방향제 위에 적힌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이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이란 문장을 책에서 찾아 책갈피의 문장과 마주하도록 끼워두고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물었다. 사과를 먹어치우는 동안 사과의 향이 흐려지고 방향제의 향이 진해졌다. 애매하게 섞인 두 향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 사과를 다 먹었고 사과의 남은 조각을 버리기 위해 주방으로 나왔다. 사과도 방향제도 아닌 향을 지우고 싶어서 에스프레소를 내리기 시작했다.
원두가 추출되는 동안 약간 몽롱해졌다. 초점이 흐릿해지고 지금 추출되어 내려오는 커피 원액이 잔의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를 붙잡고 있던 중력이 약해지면서 세계와 내가 어긋나는 감각. 그 순간 주방에선 엄마가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곰탕이 수다스럽게 끓는다. 그 위로 날리는 허연 습기에 누릿한 짐승 냄새가 배어 솜사탕처럼 펄펄 날린다. 커피가 추출기를 지나는 동안엔 세계를 커피가 지배한 것처럼 뒤덮던 향이 한순간에 밀려난다. 방금 전 먹은 사과 입자가 숨 쉴 때마다 손 닿지 않는 안쪽 점막에 붙은 채로 공기의 입출에 따라 나풀댄다. 커피와 곰탕이 영역싸움을 하는 동안 자신도 한자리하겠다는 맹렬한 버팀으로.
이럴 땐 여러 세계가 동시에 흐르다가도 제각각 흐르고 있다고 내 나름의 가설을 세운다. 곰탕은 곰탕의 시간으로 끓고 커피는 커피의 속도대로 퍼지고 사과는 사과대로 머물러 있는, 개별적 세계의 총합. 그것이 내가 사는 세계라서 다 같이 흐르는 감각에 익숙하면 따로 흐르는 순간은 낯설 수밖에 없다고.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한곳에 있을 수 있고, 사실은 사랑만 있거나 미움만 있는 것이 훨씬 불가능 한 일이며, 좋고 싫고 밉고 사랑하고 멀고 싶지만 끝내 끊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지구 안에 섞여있기에 그건 물에 빠진 고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매 겨울마다 내 앞에 놓아 줄 곰탕 국물을 끓이는 엄마일 거라고. 그리고 엄마와 나는 서로의 생명에 기대 살고 누군가의 죽음에 기생해 사는 로몬이라고. (최후의 라이오니).
커피가 식어버렸다. 커피의 시간이 끝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상에 빠져있던 나의 시간이 몇 배 속으로 지나버려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세계에는 이런 작은 지식까지 알려주는 공동 지식의 창고(<인지공간>p.266)가 없으니까 우리는 상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각자의 인지 공간을 가진 걸로 하자. 서로의 인지 공간을 연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상대방의 세계와 연결되는 걸 허락받고 뜻과 이미지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를 확보해야 하며 그와 함께 적절한 시기에 전달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므로 대부분은 혼자 간직한다.
내가 곰탕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백 번쯤 말했지만 결코 오늘의 저녁 메뉴에 예외가 되지 못한 이유도 나의 전달기술이 형편없었거나, 커넥팅이 일방적으로 거부당했거나 혹은 시기를 잘못 지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쯤,....
"유난이야"
인간의 고유의 신체 지도를 가진다던데.(<로라>p.106) 나는 그 후각 지도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더라도 내 후각 지도를 엄마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고소한 그 고깃국물 냄새에 머리가 아픈, 그 감각을 엄마가 경험할 방도가 없단 말이다. 비슷한 경험을 유도하려고 해도 내가 엄마의 후각 지도를 알지 못하므로 어떤 향이 같은 감각을 유발하는지 알려줄 방도도 없고. 타인의 지도를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구나. 알면서도 또다시 서운했고 나의 의사전달이 묵살됐단 생각에 겹겹이 서운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한 공간을 공유한 사람 사이에도 각자의 신체 지도는 고유했다. 마치 겨울마다 끓이는 엄마의 곰탕처럼 고유하다는 것은 독립적이기에 배타적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나는 인지 체계를 통해 감각을 재구성하는 법을 습득하는데 실패한, 재제 3의 모그라서가 아닐까, 그래서 남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인식하는 것을 퍼즐처럼 하나하나 꿰어 맞추느라 이리도 느린 것일까. 타인과 나의 속도 차에 속이 울렁이는 걸까, 차 안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며 어지러움을 느끼듯, 나의 세반고리관이 세계의 진동을 버티지 못해 토악질을 하듯. 그렇다면 나는 태생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알려지지 않은 로 몬족이겠다.
그런데 엄마는, 변함없이 좋아하지 않는 이 곰탕을 어째서 해마다 끓이는 걸까. 하늘이나 바다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행해지는 기우제나 풍어제처럼 겨울을 나기 위한 엄마만의 의식일까. 그건 마치 시지각 이상증 환자인 마리의 춤과 닮은 것도 같았다. 어차피 보이는 아름다움 같은 건 모르(p.67 <마리의 춤>) 지만 자신만의 이유로 무대에 펼쳐졌던 마리의 춤. 엄마의 곰탕은 주방을 무대로, 겨울을 배경으로, 가족을 등장인물로 했던 축원의 퍼포먼스였나. 나는 엄마의 곰탕을 지지할 순 없지만 그 뜻만은 이해하기로 했다. 마치 마리의 무대 뒤에서 마리를 지켜보고 있던 온건한 타협자처럼. 그러나 그 곰탕마저 추억의 소재가 되기까지 논쟁과 갈등을 엄마의 뜻보다 앞세우지 않을 수 있을지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딘 상으로 추억의 한 조각이 될 이 고깃국물 냄새를 나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조안이 병에 담은 오래된 자신의 고향 냄새를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숨그림자> p.177) 로 이미지화 한 것처럼, 나는 이 곰탕의 기억을 한겨울 보름간 목욕하지 않고 버틴 남동생의 오리털 패딩으로 적어두겠다. 매 겨울 패딩을 꺼내 손질할 때마다 미간을 구기면서도 축축한 공기 속에서 국자로 거대한 솥을 휘젓던 겨울의 풍경을 담아.
아마 오늘의 저녁은 곰탕일 것이다. 곰탕보다 미간을 세배쯤 더 구기게 하는 굴김치를 얹어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과 마주 앉아 사랑할 수 없지만 끝내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을 끌어안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저녁이 될 것이다.
그 답은 벨라타의 오브가 잠들었다 깨어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오래된 협약>) 알게 될 일이다.
첫 단편집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어떤 걸 먼저 읽는 게 좋겠느냐 물으신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행성의 서점 - 방금 떠나온 세계 - 지구 끝의 온실 순이라고 말할 것 같은데. sf 장르에 낯가리신다면 더더욱 첫 작품은 우빛속. 그다음엔 약간의 습작 느낌인 행성어서점, 단편으론 조금 더 심화된 분위기인 방금 떠나온 세계, 그다음엔 장편 지구 끝의 온실. 장편과 단편을 비교하긴 힘들지만 나는 단편 쪽에 손을 더 들고 싶고, 우빛속과 방금 떠나온 세계는 취향에 따라 갈리지 않을까. 나는 방금 떠나온 세계에 한 표 더.
왜냐면 책 읽다 눈물이 난 건 이 책의 <오래된 협약>뿐이었으니까. (하 씨.. 노아..ㅠㅠ)
세계의 가장 작은 존재 미생물들이 주인공이 될 글을 작가님은 정말 오래전부터 마음에서 키워내고 계셨구나. 머잖아 만나볼 수 있겠구나. 전작들을 다 보고 난 후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좀 천천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이리저리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체화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데, 간격이 너무 밭은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