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플래그를 어마어마하게 붙이게 만든 책을 만났다. 교사로 살면서 정체성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철학적으로 길을 안내하는 책이다. 파도를 타듯 다양한 분야의 책을 넘나들며 길을 찾고 있는 교사들에게 안내등을 비춰준다. 그 빛을 따라 내 입장을 연결지어 보았다.
교사로서 길을 잃었다. 학교에 가기 싫은 상황을 고상하게 표현해 본다. 왜 학교에 가기 싫은가? 거꾸로 직업과 관련된 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수업 준비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머리 속에 그린 수업을 디자인 하고, 자료를 찾고, 다른 선생님들의 자료를 참고하고,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적합한 수업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막상 준비한 수업을 할 때는 수업 준비를 할 때만큼 설레지는 않는다. 그래도 준비하고 상상한대로 수업이 마무리되면 뿌듯하다. 교사는 수업을 하는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내 본업에 충실하고 싶은데 현실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행정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데 가끔 행정 업무가 폭발할 때가 있다. 학교는 업무마다 성수기가 다른데, 그 성수기가 되면 자연히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하는 시간이 수업 준비 시간이다. 본질의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대부분 교사들은 마주했겠지만, 해결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사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지역적으로는 안되더라도 단위 학교 단위로 힘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학교마다 교직 문화가 다르다. 경험적으로 대체로 연대가 빈약한 곳에서 근무를 해왔다. 5년 머무르다 떠나는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도 운이 좋아야 5년 같이 근무할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평생 몸 담을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속감도 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탈하게, 모나지 않게 지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신이 될 수 있다. 나의 열정과 노력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 책은 가장 먼저 이런 부분을 언급했다. 법조계에서 판례가 쌓이고, 의료계에서 임상 데이터가 쌓이듯 교직도 데이터가 축적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유연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평소 많이 느끼는 부분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블로그에 수업에 대한 기록을 혼자 남기고 있지만, 여전히 갈증은 있다.
올 초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더 이상 담임을 못 할 수도 있겠다.' 담임을 안한다면 나의 자리는? 이래서 부장을 하는 것인가? 지금은 별 다른 생각이 없지만, 이 책이 언급한 두번째 주제가 승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이'는 '도전과 포기'라는 양극단에 치우친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아우르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87쪽
만약 승진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교사가 있다면, 소유보다 '존재하는 삶'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성급한 판단보다 느긋하게 선택하며 판단을 미루라고 한다. 성급하게 '소유하는 삶'을 선택했다가 모든 것을 이룬 후에 다가올지 모를 허탈감과 소외감을 우려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태도가 핵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사로서 나의 소신은? 지금 지키고 싶은 나의 소신은 '양질의 수업'이다. 교사의 존재적 가치이자, 스스로 긍정적 몰입을 할 수 있는 시간. 그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내면의 골방'이 있는가? 내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내면의 골방인가? 그리고 그 곳에 나에게 몰입할 수 있는 마음의 스위치가 있는가? (있다. 책과 여행)
교사는 '교실 속 유일한 어른'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학생들에게 내 모습이 본받을 만한 어른으로 비춰졌을지 생각했다. 학생들 앞에서 교사다운 외양 뿐만 아니라 수업 안에서 전달하고 싶은 가치가 많았는데, 나를 거쳐간 학생 중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것을 배웠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새로운 경험을 접할 수 있는 수업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꾸준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너리즘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와 학교라는 시스템이지만, 이것을 지속하는 것은 교사 본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매너리즘은 원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다. 그래서 그 시간을 지나지 않는 교사는 거의 없다. 문제는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교사가 의외로 많다는 것과 그것을 인지해도 계속 거기에 머무는 교사가 많다는 데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매너리즘은 어쩔 수 없는 수동적 '빠져듦'이라기 보다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 '선택'에 더 가깝다.
324쪽
매너리즘이란 가치의 빈곤함이라고 한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사람, 직업은 없을 것이다. 그럼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을 하라.'고 주문한다.(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인용)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불편함을 느끼고(불편함에 대한 긍정), 저항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열정/이성을 품은 광기)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고, 교사의 소신은 전부 길이 될 수 있다. 이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다시 직업적 정체성과 길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