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아키라, 송영경 역, [파선, 뱃님 오시는 날], 북로드, 2025.
Yoshimura Akira, [HASEN], 1982.
원작은 1982년에 출간한 오래된 소설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요시무라 아키라는 기록문학과 역사문학의 대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번역 출간을 하면서 호러에 초점을 두고 홍보(?) 하기보다는 근대 이전의 일본 어촌을 조명한 기록문학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어땠을까? 공포 소설의 재미를 넘어서는데, 글 솜씨와 구성이 아주 좋다. 가난한 어촌에서 아홉 살 소년 이사쿠의 눈으로 본 세상은 생의 투쟁으로 치열하고 광기 어린 집착이 있다.
사나워진 바다는 때로 마을에 생각지 못한 은혜를 베푼다. 이는 척박한 밭이나 갯바위에서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여 수년간 마을에서 고용 하인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은혜는 매우 드물게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산다. 단풍은 바다의 축복이 마을에 임할 가능성이 높은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p.17)
남쪽은 해안 절벽이고, 북쪽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가로막힌 고립된 마을의 열일곱 가구, 매화꽃이 피면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계절에 따라 정어리, 오징어, 꽁치, 문어를 수확하고... 여자들은 잡아온 생선을 말리고, 갯바위에 나가 조개와 해초를 채취한다. 산비탈을 개간해서 곡식을 심지만, 늘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병자의 죽음을 입 하나 더는 것으로 여길 정도이니... 그래서 장성한 남자와 여자는 항구의 고용 하인으로 팔려가는데, 그러면 남은 가족은 잠시나마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친 바다의 은혜! 산이 단풍으로 물들면, 어민들은 하나같이 뱃님을 기다린다.
사헤이에 따르면 뱃님은 마을 앞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 좌초한 배를 말한다. 뱃님에는 보통 음식, 집기, 기호품, 천 등이 잔뜩 실려 있고, 이 물건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충분히 윤택하게 해준다. 또한 암초와 파도에 부딪혀 바닷가로 밀려온 파선의 목재는 집을 수리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겨울을 앞두고 열리는 마을 의식은 항해하는 배가 암초에 좌초되어 부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p.19-20)
파선으로 떠내려온 배, 마을 앞 바다에 좌초된 상선... 그 안에는 쌀을 비롯해서 평생 누려보지 못한 것이 들어 있다. 몇 년간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가족 중 누군가가 팔려가는 일도 생기지 않는다. 겨울이 오고 북서풍이 불면, 파도는 높아지고 파선의 기회는 온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뱃님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고, 소금 굽기를 시작한다. 파선은 뱃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고립된 마을의 비밀로 자리 잡았다.
"소금 굽기는 뱃님이 해변 가까이 다가오시라고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사쿠는 다시 캐물었다.
"기원만 하는 게 아니야.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해변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지."(p.38)
이사쿠의 아버지는 3년 계약으로 팔려 갔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돌봐야 한다. 그는 마을의 관습대로 해변에서 소금 굽기를 하는데, 일을 배우면서 한겨울의 소금 굽기는 해변의 암초로 배를 유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센 파도에 휩싸인 배는 소금 굽는 불빛을 보고 해변으로 배를 돌리지만, 결국 좌초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불행이 행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뱃님맞이는 이 마을에는 최고의 경사인 반면 이웃 마을을 비롯한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극형을 받아 마땅한 악행인 것 같다. 만일 뱃님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마을은 소멸해서 암초투성이 바다에 면한 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뱃님이 존재하기에 대대로 선조들이 이 땅에 살았고 자신들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p.150-151)
축복이 악행으로 여겨지는... 파선으로 뱃님이 오고, 마을은 잠시 풍요롭게 된다. 집집마다 들뜬 분위기, 험상궂은 표정은 사라지고 눈빛마저 온화해진다. 이사쿠는 이러한 마을의 오랜 관습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굶주림과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윤리 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뱃님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뱃님이 없었으면 진작에 사라졌을 마을과 사람들... 또다시 뱃님이 오고,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불행을 맞이한다.
기록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