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이 압권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을 따온 책이라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책은 순식간에 페이지가 지나갔다. 맨 뒤의 책장을 넘기며 또다른 젊은 한국 작가의 책 생각을 했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두 책 역시 분홍색 표지를 하고 있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후루루 읽힌다. ‘읽힌다’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읽힌다’는 비문이 어울릴 정도로 노력 없이 읽을 수 있다. 재미있어서, 읽기 쉬워서.
작가의 프로필을 보지 않아도 파랗게 젊으리라는 걸 잘 알겠다.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 여성들이 늘상 겪는 일상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약간의 냉소가 섞여 울적하나 코믹하게 보인다.
“빛나 언니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에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P.28)
첫 번째 에피소드 《잘 살겠습니다》에서는 결혼 청첩장 가운데 오가는 머릿속 계산이 실감났다. 나 역시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필요할 때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마뜩찮아했고, 더 오래 연락이 없다가 결혼한다며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불편해 했으며, 더 심각하게는 결혼식 이후로 연락을 딱 끊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청첩장 줄 때 썼던 식비까지 계산이 되더라.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사회생활하는 어른이지. ‘당근마켓’을 연상시키는 ‘우동마켓’과 거기 유명한 셀러 ‘거북알’의 이야기는 사회생활의 더러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지우지 못할 거다. 거북알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대표의 비열함과 그 결과의 상징인 ‘포인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먹고사는 게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후반부는 나의 소개팅 흑역사를 그대로 상영하는 것 같은 착각까지. 아아… 이 작가 정말 포인트를 잘 찝는다.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유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여자 만날 만큼 만나봤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이렇게, 진짜,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는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지유씨 좋아하는 거라고요.”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P.96)
《도움의 손길》 역시 강렬했다. 맞벌이 부부, 혹은 싱글 생활자에게 꼭 필요한 도우미서비스를 소재로 하여, 각자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심과 은근히 서로를 간접-직접 착취하는 모습. 우아한 척 우악스러운 척하는 모습이 뒤섞여 괴이했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어떠한가, 혼자 사는 여성의 공포를 그토록 직접적으로-그러나 있을 만한 사건을 대입해서 만든 에피소드라니. 반대편 오피스텔이 성매매 오피스텔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구남친’이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요량으로 인터넷 남초 사이트에 그녀의 주소를 올려놓은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있을 법한 상상을. 그리고 바로 그 장면, 머릿털이 쭈뼛 서는 장면. 그녀의 ‘무난해서 완벽한’ 구남친이 성매매를 위해 찾아온 남자들 중의 하나였던 것. 너무나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 내 주변 남자들이, 내 소중한 남자친구가 성매매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건 여성에게 무릎까지 찬 두려움이다.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알고나면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어 더 무서운 두려움. 여성 입장에서야 늘 가진 불안을 글로 읽는 거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남자들은 엄청 불편했을 것 같다. 그 불편함을 여성인 나로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 없는 불편함이라 또 달리 괴롭고...
항상 수능 5등급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조언을 받는데, 여기 참 좋은 모델이 있었다. 한편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겠구나 싶어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달라졌는데 나는 너무 느리게 올드한 자리를 지키는 건가. 재미있게 읽고 나서도 생각이 많다. 현실이 원래 그런 것처럼, 너무 현실적인 건 너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