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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서 진리를 찾는 학문, 인류학
  • 오은선의 한 걸음
  • 오은선
  • 16,200원 (10%900)
  • 2022-12-08
  • : 341

<<오은선의 한 걸음>>

오은선 지음, 허원북스 2022

1.

오은선의 등반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됐다. 오은선은 등반이란 ‘강자’가 되는 게임으로 보았다. 7대륙 최고봉 완등, 8천 미터 14좌 완등은 자신이 강자임을 보이는, 강자가 되는 등반 게임이었다. 특히, 8천 미터 14좌 완등보다도 한 시즌에 두 개씩 연속으로 시도해 15개월 만에 8개 봉을 무산소로 오른 것을, 남녀를 불문하고 아직껏 아무도 성공한 적 없기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고도 했다(286쪽).

그런데 박영석, 김재수 등은 ‘진정한 강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박영석은 ‘경험이 많다고, 힘이 세다고, 유명하다고 동료를 하대’했고, “약자를 넓은 아량으로 배려할 때 진정한 강자가 된다”(55쪽)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강자’들의 거짓된 모습은 밝혀야 마땅하다, 세상이 누가 진짜 강자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오은선이 책의 대부분을 수많은 비난, 폭로, 부정적인 언급들로 채운 이유인 듯하다. 세어보니 60곳 이상이었고, 대상자도 30여 명을 넘었다. 반대로 자신은 ‘진정한 강자’였다. 십여 곳 이상에서 자신의 선행이나 위업 등 비범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비난이 집중된 인물은 박영석, 김재수 둘이다. 둘은 오은선에 따르면 칸첸중가 등반 논란 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박영석과 SBS의 유착으로 <그것이 알고싶다> 편이 오은선에게 불리하도록 결말을 정해둔 채 제작됐으며, 대한산악연맹은 박영석의 선배인 이인정 회장의 주관으로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미등정을 결정하게도 되었다고 한다. 김재수는 깃발 건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지 오은선은 더 자세히 묻지는 않는다. 박영석에 대해서는 동료에 대한 무시, 조급증, 언론 앞에 포장하려는 모습을 지적했고, 김재수는 약삭빠름, 무책임함, ‘계속 사고가 나는’ 우연과 함께 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오은선은 이들이 그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듯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을 일이다. 오은선은 여러 차례 ‘미신적인’ 일화들을 언급한다. 이상한 꿈, 비행기 좌석 번호나 베이스캠프 입성 날짜의 우연, 라마 목걸이가 풀어져 있는 일 등을 통해 ‘좋은 징조’라든가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의 보호’를 유추한다. 즉 오은선이 보는 세계 속 인간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다.

오은선은 전문등반 산악계에 뿌리 깊은 남성중심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관행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런 관행의 원인도 따라서 그런 '나쁜 사람'들로 귀결된다. 자신은 피해자였다. 베이스캠프에서 여자 얘기만 하는 남자 후배들, 속임수를 쓰며 화투를 치는 남자 동기, 잔소리를 심하게 하는 후배, 자기를 칭찬하면 좋아하고 남을 칭찬하면 외면하는 남자 대원들 등등. 집단주의적 원정 관행도 비판하면서 마침내 자신이 홀로 원정대를 조직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2.

이 책은 출간 직후 논란이 됐다. 일반 대중 사이의 큰 논란이 될 정도는 아닌 듯하다. 가장 크게 다룬 게 <월간 산> 2023년 2월호 인터넷판으로 낸 기사다. 양측의 주장을 다룬 기사로, 기사엔 댓글들도 꽤 달렸다. 3년 전에 오은선은 체육학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했다. 그 논문에 담긴 내용 대부분이 이 책에 수정, 보완되어 담겨 있다. 그 논문에서는 인물들 이름은 영문 이니셜로 처리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실명이다. 책이 출간되고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된 몇몇 인물들은 법적인 조치까지 시사하고 나섰다.

내 주변에서도 이 책의 논쟁점을 언급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본인이 비난 당사자가 아닌 한 반응은 대개 소극적이었다.

책을 주의 깊게 읽었다. 책에 나온 사례 몇몇은 나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기도 했다. 몰랐던 내용을 알게 돼 유익한 부분도 여럿이었다. 무엇보다 남성중심주의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그간 한국의 등반문화를 저자가 지적하고 나선 것은 크게 공감했다. 비록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의 일이 되었고, 그동안 그런 문화나 관행은 대부분 자취를 감춘 게 사실이지만, 그것들을 돌아보고 들춰내어 돌이켜야 한다는 저자의 (숨은) 뜻에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그게 실행에 옮겨진 부분은 다소 아쉬웠다. 남성중심주의적, 억압적인 문화를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들을 의심하지 못했거나 어찌할 줄 몰랐던 일부 당사자들에 대한 비난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 비난은 쉽게 글쓴이의 정당성, 진정성, 강함을 입증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돼 더 아쉬웠다.

3.

오은선은 책에서 자본(기업)과 언론과 등반가의 협업 관계를 언급하고 있으나 이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등반가들은 단순히 산에 오르고 싶은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멋지고 대단한 우러러 보이는 등반을 하고자 해 왔다. 그렇게 ‘대단한’ 등반에는 벌써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거액이 소요되는 비즈니스다. 등반가들은 따라서 기업에 손을 벌렸다. 기업은 본성에 충실해 유불리를 엄밀하게 따졌다. 공짜 지원은 없었다. 지원도 대개 세금 공제되는 기부 성격이었다.

기업 협찬에 언론은 필수였다. 거액이 소요되는 히말라야 등반 생중계는 따라서 대개 협찬사에서 지원했다. 언론은 등반이라는 사건, 현상에서 화두를 집어내 증폭시켜왔다. 눈길을 확 끄는 표현, 주로 '등반가 사이의 경쟁'으로 등산을 재정의했다. 등반가들은 언론에게 ‘8천 미터 14좌’ 같은 쟁점이 될 만한 '트로피'를 알려준다. 언론은 이를 두고 ‘최고 등반가’ 따위의 타이틀을 부여한다. 거기서 협찬사는 ‘국위선양’을 지원한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된다. 기업이 먼저 나서서 등반 후원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언론과 기업 모두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말단 직원부터 회장에 이르기까지, 업계에 있으면 사람의 몸과 마음 자체가 그렇게 바뀌는 모양이다. 그게 싫어 옷을 벗고 나오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나머지는 그게 사는 방식이려니 하고 맞추고 살았다. “우리는 늘 이런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니까”하며 그런 게 옳은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믿었다. 비난의 화살을 받은 건 언제나 등반가들이었다. 언론과 기업은 손해를 입은 적이 없다. 대한민국 등반사에서 기업이 손해를 보는 일은 고작 몇 건 있었는데, 그 손해란 것도 얼마의 돈으로 해결할 일이었다.

4.

오은선은 “등산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순수한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혹하며 신중한 도전이다”(14쪽)라고 정의했다. 등산을 ‘순수’한 활동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다.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우리 안의 적’을 가려내는 검열과 반공의 계몽주의가 사회를 쥐어짤 때의 일이다. 이숭녕, 홍종인, 이은상 등 당시 한국산악회 지도부 임원들은 이런 ‘순수 등산’의 담론을 창안했고 유포했다. 거기서 스포츠적 경쟁을 통한 우위가 아닌 밑도 끝도 모를 ‘순수성’의 정도로 등산가들의 순위를 매겼고, 『등산』 등 유력지는 대표 산악인으로 한국산악회 지도부 임원들을 매달 한 명씩 소개했다.

순수란 ‘잡것이 섞이지 않음’을 말한다. 즉 ‘등산은 순수하다’라는 표현은 불순한 대상을 가려내기 위한 것, 달리 말하면 누군가를, 누군가의 등산을 ‘불순’으로 규정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하다. 동시에 그런 규정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의 안목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5.

등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각각의 등반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난이도 등급에 따른 위계는 있다. 그러나 5.12급 등반이 5.10급 등반가들에게는 대단한 일로 보일지라도, 5.13급을 오르는 이에게는 대단한 게 아니다.

물론 5.10급 등반가들 앞에서 5.12급 등반을 선보이며 박수를 받으면 으쓱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박수는 공허한 것,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5.13급을 오르는 그이가 사람들 앞에서 등반력을 자랑하는 것을 아무리 즐겨하는 이라 할지라도, 그가 그런 수준에 오른 이로서 그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5.14급을 오르느냐 마느냐의,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위험’을 내포하는 전통등반, 알파인등반, 고산등반의 영역에서는 더욱 의미심장한 문제가 된다. 자신의 안위,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서 오르려고 하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가, 마침내는 등반가 자신이 정의하는 바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말했듯 오은선은 등반을 '강자가 되는 게임'으로 여겼다. 여기서 강자란 타인과의 비교우위를 뜻했다. 박영석, 김재수, 파사반, 고미영, 한왕용, 박경이, 홍보성, 계명대 대원들 등등과의 무수한 비교우위를 통해 책에서 드러난 결론은 본인이 최종 승자라는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만 놓고 본다면 오은선이 경쟁상대로 삼았던 그들도 하나같이 등반을 '강자 되기'로 여겼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런 쓰디 쓴, 때로는 한심한 공방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국가주의를 타고 등반가-언론-기업의 삼각 카르텔이 올랐던 거대한 거품이 터지고 남은 상흔들이다. 다만 땅에 떨어진 명예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애석한 자화상이다.

등반에 경쟁은 필수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등반이라는 스포츠의 총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일이다. 어떤 등반을 좋다, 나쁘다라고 평가하는 나의 기준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향받아 구축된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성과와 나의 성과를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 ‘비교’에의 유혹은 힘에의 유혹, 권력에의 유혹과 같은 종류다. 여럿이서 한목소리 내기, 수많은 ‘좋아요’ 수, 함께 치는 박수, 한마디 한마디 끝나고 이어지는 아멘의 합창, 국기 앞에 모두 숨죽이는 의례. 그리고 그런 다수성의 권력 앞에 세워진 한 인물, 하나의 포스트, 하나의 문장, 하나의 메달. 등반이 그런 것이었던가? 자신의 안위,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서 원했던 것이 사람들이 답례로 보여주는 제스처들에 있었던가?

등반은 어차피 ‘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근대인의 수많은 질문 행위 중 하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등반은 가장 새로운, 누구도 몰랐던 등반이자, 그만큼 나만의 등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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