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평자)는 교회를 다니고 대학에서 종교인류학을 가르치는 40대 남성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장단점이 극명하다.
장점으로는 다음을 꼽겠다.
페미니스트 기독교의 역사, 쟁점을 쉽고 간명하면서도 난해한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망라했다.남성중심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의 맹점을 신랄하고 적절하게 파헤치고 극복하고 있다.우머니스트로서의 저자의 입장을 이들 사이에 잘 위치시키고 논쟁을 잘 전개한다. 앨리스 워커의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등. 하나님의 번성하라라는 말씀을 "살림"으로 이해하고, 여성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서양에서 생성된 페미니즘을 한국인, 한국 여성의 관점에서 보는 신선함과 문화충격 등도 적절히 배합해 설명한다.구어체의 장점을 살려, 주류 기독교 내에서 꽤 극단적일 수 있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독자를 잘 설득한다.이 장점들만으로도 너무 훌륭해 내 아이들에게까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단점에 대한 주의와 함께다. 단점이라기보다는 논의의 맹점들이 선명하다. 역시나 페미니즘의 이론적 지향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저자는 페미니즘은 다양하다고 누차 주장하지만, 책의 후반부에 들어 어떤 것들은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한다. 저자는 자신을 윤리주의자라 칭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최선의 페미니즘을 선택하고 그 입장의 장점을 주장하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는 저자의 윤리주의적 관점은 사회, 문화별 차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
특히 개인주의의 근대사회를 이상적 모델로 설정한다. 페미니즘이 꼭 그래야 하는가?
또 성평등 억압 구조의 타파를 최우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억압의 구조에는 차원이 다른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젠더만이 아니라 인종, 계급, 종족 등 다양하다. 그러한 다름에 대한 고려 없이 억압받는 자들을 하나의 부류로 묶을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해방시키는 페미니즘이 정의를 되돌리는 방책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학자로서 저자는 존재적 평등이 아닌 '권력의 평등'을 복음이라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을 사회적 평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배제되는 자가 없는 나라"라면서, "바벨탑처럼 높이 쌓아서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수평적 마주함으로 이루는 나라"(51) 라고 한다. 왜 수직/수평의 이분법을 도입해야 할까. 하나님은 수평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없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 특히 사회 참여의 기회 및 권리의 평등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와는 동떨어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의 개념일 뿐이다. 거기에서 핵심은 개인이지 개인 간의 관계가 아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계가 언제나 핵심이었다.
"남성 없이도 온전하고 완전할 수 있다는 여성의 주체 선언" (35)을 페미니즘이라 하면서, 가부장적 남성들은 이를 남성성에 대한 모욕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두 가지 점에서 실망스러운 언급이다. 첫째, 남/여든 누구든 간에, 각기 개인이 타자 "없이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가족, 공동체, 사랑을 강조한 기독교 전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한 페미니즘적 개인주의에 대한 불편함은 비단 가부장적인 남성들만의 소유물인 것도 아니다.
둘째, 저자의 가부장제에 비판은 대부분 환상 또는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어느 페미니즘 서적에서도 가부장제를 제대로 비판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저자는 가부장제와 가부장제의 남용 사이의 구분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가부장제는 물론 남용되기 쉬운 제도지만, 어쨌거나 '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부장제는 폭력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부장제 속에 사는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주체성의 실현들을 포착하지 못하게 되고, 이들을 그저 미혹 속에 사는 불쌍한 인간들로 취급하게 된다. 가부장제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는 권력의 평등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의 Our Passion for Justice (1984, 93쪽)를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너는 내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는 너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널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권리를 옹호해 주고, 너의 공간을 확보해 주고, 너를 지지해 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힘을 이 세상 안에서 주장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너와 함께 (손잡/고) 싸워 나가는 거입니다, 너랑 싸우는 게 아니지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는 그래서 "혁명이여 시작되게 하라"는 뜻이에요.
"존재의 상호적 흐름"이에요. 바로 이 힘 때문에 세상은 바뀔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반 하나님적인 질서나 삶의 방식과 싸우는 투쟁을 지속할 수 있어요. 사랑은 너/를 조정하려는 힘이 아니라 관계하려는 힘이요,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힘이죠. 그래서 그런 사랑은 언제나 정의로운 거예요. 155~7.
'너는 너의 것'이라고 구분짓는 것은 관계의 재편일 뿐이다.
주체성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미흡한 인식이 아쉽다.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도 우리는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소개하며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의 주장은 결국 그로 회귀하는 것 같다. 즉 여성으로서 자립해 커리어를 쌓으며 주변과 나눔 및 선행을 실천하며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복음적인 사회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 종교다. 죽음 뒤엔 영생이 있다. 현생의 삶은 일종의 테스트다. 현생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천국의 상태로 만들어 내는 게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관점은 기독교 신학 내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기독인에게의 소명이란 믿음이며, 믿음은 인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에서 나온다. 사회 정의는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투쟁해야 하는 가치지만, 하나님은 그 투쟁에 뛰어드는 인간의 태도, 노력을 보시지, 그 결실을 현생에서 이루어내는 것을 보고자 하신 게 아니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남녀 불평등의 문제는 인종주의, 환경문제, 빈부격차 등등과 더불어 당연히 심각한 문제다. 우리 각자가 여기에 크게 영향 받고 있다. 고통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라는 것은 그간 보수 기독교의 주장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고통을 극복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제시한다. 책의 가장 큰 맹점은 비기독교적 사회운동의 교리들을 그대로 끌어들인다는 것에 있다. 관계가 아닌 개인의 권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결국 방어적일 수 밖에 없는가? 이는 특히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가져다 쓴 고대 그리스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다.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했던 것은 다른 종류의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숱한 신학자와 신앙인들이 고백했듯이, "네 것을 모두 팔아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라는 것 같이 예수님의 겉보기엔 모순적인 언행들에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