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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 Green’s Bookshelf
  • 희랍어 시간
  • 한강
  • 11,700원 (10%650)
  • 2011-11-10
  • : 169,187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는 기억할 수 없을 거라고.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대체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름다워서, 문장들을 읽으면서 황홀감에 숨이 턱 막혀오고 전율이 일었다.
군더더기도 없이, 적절한 명사와 몇 개의 수식어들로 진실을 관통하는 날선 예리함에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 문장.
언어의 자의성이니 사회성이니 하는 특징으로부터 파생될 수밖에 없는 권력과 소외의 문제 등등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며 지식을 과시할 필요도 없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단어나 장식적인 수사로 멋을 부리지도 않았다. 일상적인 단어들의 조합으로 밀도 높은 문장을 담담히 뱉어낸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내면을 얼마나 괴롭혔을지, 성실한 사유의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 동안의 삶의 궤적은 과연 어떠했을지 자꾸만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얻기 위해 재빠르게 스캔하는 방식의 글 읽기만 해오던 나날 가운데서, 책장을 차마 못 넘기며 한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는 방식의 글 읽기를 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그저 스캐닝하며 지나쳐버리기 아쉬워서 천천히 탐닉하는 방식의 독서.



한강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고 <채식주의자>도 괜찮았지만 다소 작위적으로 보여 그보다는 좀더 직설적이었던 <내 여자의 열매>가 좋았고 그보다는 <희랍어 시간>이 훨씬 황홀하다.
그 감동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글 나부랭이가 비루해서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201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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